박인비 “18번홀에서 들은 애국가는 최고의 노래였다”

입력 2016-08-24 04:07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여자골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박인비가 23일 인천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서며 할아버지 박병준옹과 포옹하고 있다. 뉴시스

“마지막 18번 홀에서 들었던 애국가가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노래보다도 최고였어요.”

골프 사상 최초의 ‘골든 슬래머’가 조국으로 돌아오며 터뜨린 첫 일성이었다. 자신을 골프장에 처음 데려갔던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선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어떤 순간에도 조금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던 ‘침묵의 암살자’도 가족 앞에선 달랐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분명 눈시울이 붉어졌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여자골프 금메달리스트 박인비(28)는 그렇게 금의환향했다.

23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박인비가 나오자 할아버지 박병준(84)옹은 달려나가 손녀를 안았다. 그리곤 “내 손녀가 이제 국민의 딸이 된 것 같네”라며 눈물을 쏟았다. 박인비는 어떤 골프대회에서도 볼 수 없던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할아버지, 왜 우세요”라며 이내 눈물 가득 고인 눈이 됐다. 자신의 금메달을 할아버지 목에 걸어드렸다.

박옹은 박인비가 어린 시절 “아들 손녀와 함께 골프 치는 게 소원”이라며 처음으로 골프장에 데려갔던 분으로, 지금의 골든 슬래머를 만든 주인공이다. 다른 가족들이 차례로 박인비를 반갑게 맞았다.

기자들이 몰려와 질문세례를 퍼부을 때도 박인비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박인비는 “매 순간 메이저대회에서 마지막 조로 경기하는 것같이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고 지난 21일 경기를 회상했다. 이어 “그동안은 늘 나를 위해 경기했는데 이번엔 조국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고 했다.

1998년 7월 7일 초등학생 박인비는 골프 애호가인 아버지 박건규씨 곁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화면엔 US여자오픈 마지막 라운드가 나왔다. 박세리(39)의 ‘맨발 투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박인비는 아빠에게 말했다. “나도 골프 할래요.” 그렇게 ‘세리 키즈’가 됐고, 18년 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미국의 골프 전문 매체 ‘골프채널’은 23일 내보낸 정복 특집기사를 통해 “‘세리 키즈’에서 출발한 한국여자골프계에 ‘인비 키즈’를 낳는 기념비적 사건이 벌어졌다”고 타전했다. 이어 “박세리를 보고 골프를 시작한 세대가 세계 골프를 정복했듯이, 박인비를 보고 골프를 시작한 세대가 다시 골프계를 호령할 것”이라고 했다.

골프채널은 또 “박세리가 US여자오픈 우승으로 한국인들의 열정에 불을 붙였다면 2016년 박인비는 한국인들에게 자부심을 안겼다”며 “박인비는 한국 선수들 중 박세리의 그림자에서 마침내 벗어난 선수”라고 썼다.

미국여자골프(LPGA) 변진형 국제비즈니스 전무이사는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인비의 우승 장면은 박세리의 US오픈 정복에 필적할 유일한 TV중계였다”고 했다. 박인비의 올림픽 경기 장면의 시청률은 무려 23.9%에 달했다. 황금시간대 TV 메인뉴스보다도, 웬만한 인기 드라마보다 높았고, 1998년 박세리의 그 장면에 버금가는 시청률이었다.

박인비는 인천공항 기자회견에서 “다음 도쿄올림픽 출전을 장담하진 못하지만, 만약 그때도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면 좋은 목표가 될 것”이라고 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컨디션 회복이다. 복귀 시기는 경과를 보면서 정해야 할 것 같지만 에비앙 챔피언십에 나가고 싶다”고 밝혔다. 9월 중순 열리는 에비앙 챔피언십은 2013년 LPGA 투어에서 메이저대회로 승격된 시합으로, 박인비가 승격 직전 우승했던 대회다. 이미 4대 메이저 정복자인 만큼, 다섯 번째 메이저도 차지해 ‘슈퍼 슬램’(5개 메이저대회 정복)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2011년 US여자오픈 챔피언이자 마지막까지 이번 올림픽 출전 자격을 놓고 겨뤘던 유소연(26)은 “인비 언니는 현재 여자골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했다. 지금 언니가 얼마나 놀라운 여인인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박인비와 함께 출전했던 전인지는 “언니는 최고의 중압감 속에서도 금메달이란 성과를 냈다. 정말 믿을 수가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