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그녀는 약골이었다. 코피를 자주 쏟았다. 수건을 흠뻑 적실 정도로 흘린 코피 때문에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씩씩했다. 밖에서 뛰노는 걸 좋아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승부욕도 강했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를 할 때 그녀는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공을 차고 놀았다.
‘산만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운동이 좋았다. 육상이나 축구처럼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스포츠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딸에게 태권도를 권유했다. 활발하지만 허약한 딸의 건강을 걱정해서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소희(22)는 그렇게 도복을 입었다.
매일 서너 번씩 도장을 들락거릴 정도로 몰입했다. 충북 제천동중으로 진학한 뒤부터는 진로를 아예 태권도로 정했다. 어머니는 사내아이처럼 자라는 딸을 걱정했다. 치마를 입히고 피아노도 가르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김소희는 깁스를 한 다리로 발차기를 휘두를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코피를 쏟던 약골 소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울체고에 입학할 정도로 체력을 키웠다. 심폐지구력은 거의 마라톤선수 수준이었다. 육상부가 탐낼 정도였다. 2009년 한 기업이 주최한 구간마라톤대회에서 종합 3위를 차지할 만큼 근성도 좋았다. 사람들은 그런 김소희를 ‘산소통’이라고 불렀다.
키 164㎝에 50㎏도 안 되는 몸무게, 핼쑥해 보일 정도의 얼굴에 가녀린 몸. 하지만 승부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손가락뼈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고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차지한 일화는 유명하다.
2011년 5월 경북 경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46㎏ 이하급 16강전에서 상대선수의 발차기를 왼손으로 막다 골절상을 입었다. 의사로부터 “손가락 신경이 마비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출전을 감행했다. 도핑테스트에 걸릴 수 있어 진통제도 복용하지 않다. 그렇게 8강부터 결승까지 이를 악물고 버텨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3년 멕시코 푸에블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하고, 내친김에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까지 정복했다. 적어도 국내 같은 체급에서 김소희를 넘어설 강자는 없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착착 들어맞았다. 마지막 목표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하지만 올림픽은 김소희에게 좀처럼 문을 열지 않았다. 46㎏ 이하급은 올림픽 체급이 아니다. 체중을 49㎏급으로 늘려도 국가대표 선발을 보장할 수 없었다. 한국 태권도는 2012 런던올림픽까지 50㎏ 이하의 경량급 선수를 차출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멕시코 WTF 월드그랑프리 파이널 첫판에서 세계 1위 우징위(29·중국)에게 0대 5로 완패했을 땐 모든 게 무너진 것 같았다.
하지만 WTF가 남녀별로 두 체급까지만 허용했던 올림픽 출전 규정을 한 체급 세계랭킹 6위까지 국가별 1명씩으로 변경하면서 김소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6위 안에는 태국 선수 2명이 있었다. 그중 1장의 출전권이 랭킹 7위 김소희에게 넘어왔다. 거의 포기한 순간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김소희는 다시 악바리 근성을 발휘해 훈련에 매진했다. 금메달 유망주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많은 구슬땀을 쏟았다. 한겨울에도 아침마다 찬물로 샤워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17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아레나3에서 열린 올림픽 태권도 여자 49㎏급 결승전에서 김소희는 티야나 보그다노비치(28·세르비아)를 7대 6으로 제압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의 리우올림픽 7번째이자 유도 레슬링 복싱을 포함한 격투기에서 처음으로 나온 금메달이다. 많은 기대를 받지 않았지만 어느 격투가보다 강한 승부욕으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을 밟았다. 김소희는 “믿기지 않는다. 그동안 하늘도 무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비로소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날까지 나흘 연속 노골드의 깊은 침체에 빠졌던 한국은 김소희의 금메달로 ‘10·10(금메달 10개·종합 10위)’ 목표를 달성할 희망을 되살렸다.
한국 태권도는 앞으로 3체급에 더 도전한다. 남자 68㎏급의 이대훈(24)은 18일 골드러시를 이어간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행운’을 ‘金’으로 바꾼 태권 아가씨
입력 2016-08-18 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