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삼의 일과 안식] 목회자의 시간

입력 2016-08-19 19:33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은 존재와 분리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며, 거꾸로 돌이킬 수 없고, 늘이거나 줄일 수 없는 비탄력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정작 시간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성경에는 시간에 대한 다른 차원의 말씀이 있다. 성경의 첫 단어 ‘태초(太初·In the beginning)’와 마지막 단어 ‘오시옵소서(Come)’는 인류의 시간이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종말이라는 시작과 끝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세상의 시작과 끝을 품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창조 이전과 종말 이후를 포함하는 다른 차원의 시간을 성경에서는 ‘영원’ 또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데, 시편에서 ‘하나님의 시간’(시 90), 전도서와 복음서에서 ‘영원’(전 3, 요 11), 예수님의 비유에서 ‘영생’(눅 18) 혹은 ‘하나님 나라’(눅 13, 17) 등으로 표현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은 고대 희랍에서 말하는 크로노스(Kronos·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흐르는 시간)나 아이온(Aion·하루 24시간 등 균질한 시간의 량)이 아닌 카이로스(Kairos·올바른 시간, 특정한 때)와 연결되는 개념일 것이다. 그래서 모세와 솔로몬의 고백에서와 같이 시간에 대한 성찰은 믿음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소멸하는 육신의 허무와 한계를 직면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게 된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땅의 시간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 연결되는지를 천국비유를 통하여 말씀해주셨다. 크로노스의 한계적 시간에서 은혜로 주어지는 카이로스를 통해 ‘이미 그러나 미완’의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은 돈과 권력과 업적의 크기에 있지 않고 생명에 기초한 것이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인들이 크로노스의 배를 타고 이름 없이 흘러갔지만, 동시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 카이로스의 시간을 함께 걸어갔다.

지난달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뉴스프링교회의 페리 노블 담임 목사가 알코올과 포르노 중독을 비롯한 정신적 문제와 가정불화 등으로 해임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달 초 대표적인 청소년사역 단체의 이동현 목사가 여고생이었던 A씨와 수년간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안타까운 것은 두 목사 모두 주목받는 차세대 리더이고, 한 번의 실수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사역의 정점에서 수년간 진행됐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 카이로스의 은혜가 없다면 성공할수록 위험 또한 더욱 커지고, 아무리 멋진 사역의 열매로 보일지라도 허상일 뿐임을 다시 한번 씁쓸하게 목도하게 된다.

우리가 큰 예배당을 짓고 교인 수를 늘리고 수많은 사역의 열매를 맺는다 해도, 하나님의 시간에 연결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종말의 때에 허무하게 소멸될 뿐이다. 목회자의 시간에는 크로노스의 트랙 이외 카이로스의 트랙이 필수사항이다. 이것은 사역과 생산적 활동이 아니라 복음의 중계자로서 자기 비움의 케노시스를 통해서 주어질 것이다. 두 분 목사의 시간에 남겨진 기대가 있다면 그 어떤 변명도 접어두고 깊은 자기반성과 책임, 진정한 회개의 시간이 있기를 소망한다. 크로노스가 던지는 염려와 허무가 더 이상 나의 공간을 탐욕으로 채우기 전에 애통하는 심령으로 카이로스의 때를 간구하자.

옥성삼 <크로스미디어랩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