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을 뛰어넘어… 옛 거장과 현대 작가 ‘아름다운 교감’

입력 2016-08-19 04:31 수정 2016-08-21 19:30
공재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1710년 작, 종이에 담채). 국보로 지정될 만큼 조선시대 초상화의 백미로 꼽힌다. 녹우당 제공
‘공재. 녹우당에서 공재를 상상하다’전은 17세기 문인화가 윤두서의 근대적 예술정신을 흠모하는 서용선, 이종구, 이이남 등 18명 작가들의 헌정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았다. 왼쪽부터 신재돈의 ‘300년 후’(2016년작, 판넬에 아크릴)와 김억의 ‘남도풍색’(2016년작, 한지에 목판) 중 녹우당 일대를 그린 부분. 행촌문화재단 제공
늘 가는 산과 바다, 그리고 계곡이다. 그래서 빤한 휴가라지만, 문화가 덧입혀진다면 달라진다. 영혼이 살찌는 인문학 기행이 된다.

지난 15일 전남 목포, 기차에서 내려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으로 가는 여정이 그랬다. 전봇대가 끝없이 이어지는 국도, 해남 명물인 고구마 밭,벌써 수확을 끝내 벌겋게 드러낸 황토밭. 그야말로 남도 풍경이 펼쳐졌다. 그 길이 더 흥겨운 건 300년의 시공을 넘은 예술가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전시를 만나러 가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공재 윤두서 자화상부터

집 뒤 비자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려 쏴-하는 소리가 초록 비가 내리는 듯하다 해 이름 지어진 녹우당. 이곳은 ‘오우가’로 잘 알려진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 문인화가 공재(恭齋) 윤두서(1668∼1715) 등 걸출한 예술 문인을 배출한 해남 윤씨 고택이다. 지금도 종손 윤형식 옹이 살고 있는 녹우당에서 가보로 소장하고 있는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를 모처럼 공개했다.

행촌문화재단(이사장 김동국·해남종합병원장)이 기획해 녹우당 영내에서 열리고 있는 2016 풍류남도 아트프로젝트 ‘공재. 녹우당에서 공재를 상상하다’ 전시를 위해서다. 이 시대의 주요 작가 18명이, 조선 후기의 관습을 흔드는 혁신적인 사고로 진경산수와 풍속화 시대의 서막을 연 윤두서를 오마주한 작품을 선보인다.

먼저 윤두서 자화상부터 보기를 권한다. 녹우당 영내이지만, 윤두서의 옛 작품은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현대 작가들의 작품은 충헌각 등 2개 건물에서 따로 열리고 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화면을 꽉 채운 얼굴부터가 전범을 부수는 파격이다. 사람을 뚫어볼 듯한 형형한 눈빛, 한 올 한올 살아있는 수염 등은 사실성을 초월해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녹우당에서 태어나고 말년 3년을 이곳에서 보낸 윤두서는 관념적 산수가 아닌 실경을 사생해 그렸고, 돌깨는 석공, 나물캐는 아낙 등 주변의 평범한 사람을 스케치했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윤두서로부터 태동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서양화가 아닌 윤두서를 잇겠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충격부터 이야기한다. 여성주의 작가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 작가는 “나는 과연 화가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나”는 물음을 던지게 됐다고 고백하며, 평소 쓰던 연필과 색연필 대신에 한지에 채색화로 그린 자화상을 내놨다. 젊은 작가들은 발랄하다. 자칭 로봇 태권V세대인 성태진은 윤두서에게 청춘은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했다. 문인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인 선비가 강을 바라보는 풍경을 패러디해 윤두서와 함께 로봇이 나란히 앉아 흘러가는 강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원색 목판에 담았다. 윤두서의 자화상이 끼친 강렬한 감동은 종손에 대한 고마움으로 표시되기도 했다. 신재돈은 윤두서와 현 종손의 초상화를 특유의 강렬한 원색 터치로 한 화면에 그려 넣었다.

압권은 김억 작가가 2년에 걸쳐 제작했다는 판화 대작 ‘남도풍색’이다.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 녹우당으로부터 보길도까지 남도 한자락을 흑백 판화에 파노라마처럼 담았다. 전통적인 부감 기법을 차용한 풍광 안에는 강진만에서 낙지 짱둥어 잡는 사람, 미황사 아래서 낚시하는 사람, 고속 페리를 타고 섬으로 가는 사람 등 지금 사람들의 삶이 풍속화처럼 담겼다. 길이 10m에 달하는 대작이지만 충헌각의 전시공간이 협소해 유리상자 안에 옹색하게 몸을 구부린 채 보여주고 있어 안타깝다. 넓은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과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전시는 전남도가 후원하는 ‘풍류남도 아트트로젝트’의 일환이다. 행촌문화재단 이승미 대표는 “도에서 지역에 산재한 인문적 유산을 바탕으로 ‘남도 르네상스’를 주창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라며 “근대정신의 효시가 된 공재 윤두서의 인문성과 예술성이야말로 우리가 부흥시켜야 할 근원임을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이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3일까지. 광주비엔날레와 연계해 비엔날레가 개막하는 내달 3일 이후에는 해남종합병원 내 행촌미술관, 미황사, 이마도작업실 등 해남 곳곳에서 전시가 있다(문의 010-3052-5870).

해남=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