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소속 태영호 공사가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을 느꼈다”며 가족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현학봉 대사 바로 아래 직책에 해당하는 고위 외교관이었다.
역대 탈북 외교관 중 최고위급인 태 공사가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이후 영국 내 외교관 활동이 급격히 위축된 상황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동안 북한 외교관들은 북한 문제에 관심이 있는 영국 정부나 의회 관계자 등과 접촉하기도 했으나 대북 제재 영향으로 최근에는 이런 접촉도, 공개적인 외부 활동도 급격히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제재 국면 돌파구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본국에서 대사관에 외교적 시도를 다각화하라는 지시가 계속됐고, 태 공사 역시 이를 심각한 압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태 공사는 주영 대사관의 차석으로서 대사관 운영 실무를 책임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제3국 망명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던 태 공사 가족이 한국에 입국한 경로에 대해 정부는 ‘관련국과의 외교 문제’를 거론하며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막내아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등 태 공사의 가족이 지난달 중순 자취를 감췄다’는 영국 가디언의 보도, 한국 입국이 발표된 시점 등을 고려할 때 제3국 경유 없이 영국에서 한국으로 바로 입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태 공사의 영문 이름인 ‘Yongho Thae’로 검색되는 페이스북 페이지는 단 하나로 베이징 소재 외국어대학에서 유학했으며 ‘주체 런던’이라는 북한 홍보 페이지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 태 공사가 ‘금수저’로 불릴 만큼 좋은 출신성분 덕에 중국에서 유학하며 영어와 중국어를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는 점에서 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태 공사는 중국에서 돌아온 뒤 5년제 평양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하고 외무성 8국에 배치됐다. 이어 김정일 총비서의 전담통역 후보인 덴마크어 1호 양성통역으로 선발돼 덴마크 유학길에 올랐고 스웨덴을 거쳐 귀국한 뒤 유럽연합(EU) 담당 과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영 대사관에 부임한 이후에는 지난해 5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친형 김정철이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동행한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앞서 영국 BBC의 서울·평양 특파원인 스티브 에번스는 ‘내 친구 탈북자(My friend the North Korean defector)’라는 글에서 태 공사가 보수적이고 말쑥한 영국 중산층 같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태 공사는 에번스에게 “올 여름 평양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에번스는 그가 가족과 함께 제3국으로 망명할 것이라고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으며, 체제에 대한 불신이나 의심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정건희 조성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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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체제 염증과 실적 압박으로 망명한 듯
입력 2016-08-17 21:35 수정 2016-08-18 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