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불거진 ‘건국절’ 진영 싸움
입력 2016-08-17 18:06 수정 2016-08-17 21:30
정치권에 역사논쟁이 또다시 벌어졌다. 이번에는 건국절 논란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이은 역사논쟁 2라운드인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짧게 언급한 것이 정치권에 회오리를 몰고 왔다.
특히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에 대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고 반박하며 논쟁이 불붙었다.
역사논쟁의 문제점은 사관(史觀)이 판이해 설득과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민생은 뒷전이고 역사논쟁에 목을 매는 정치권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여야의 정략적 의도가 담긴 역사논쟁이 답 없고 소모적인 장기전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여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의미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패배주의 역사관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것은 자해(自害) 사관, 좌파 사관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아예 8월 15일을 ‘광복절 겸 건국절’로 법제화할 태세다. “건국절을 자유민주체제를 세운 날”로 규정하며 보수적 가치를 확산시키겠다는 전략이다. 건국절 논란을 통해 보수층을 재결집시키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박 대통령의 발언이 임시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한 ‘뉴라이트 역사관’ ‘친일 옹호 사관’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고 있다.
더민주 내부에서는 박 대통령의 가족사로 인해 현 정부에서는 역사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더민주 당권주자인 이종걸 의원은 “박 대통령은 임시정부를 비롯해 항일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면서 “그 이유는 (일본) 관동군에 복무한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야권 대권주자들은 현 집권세력을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집단으로 몰아세우면서 자신들은 독립운동 정신과 임시정부의 가치를 계승했다는 이미지를 쌓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17일 역사논쟁에 일제히 뛰어들었다. 새누리당 중진의원들은 건국론에 대해 ‘얼빠진 주장’이라고 비난했던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정현 대표는 더민주에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이 대표는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간담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야당 대선 후보를 지낸 분도 분명한 입장을 얘기했기 때문에 (정진석) 원내대표와 상의해 국회 5분 발언 등을 통해 건전한 토론이 이뤄지도록 하는 여러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정 원내대표는 “진영논리로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문 전 대표야말로 반역사적, 반헌법적, 반국가적인 이런 얼빠진 주장을 삼가길 바란다”고 직격탄을 쐈다.
중진의원들은 건국절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심재철 국회부의장은 “모든 사람에게 생일이 있듯 우리나라의 생일은 1948년 8월 15일”이라며 “이 부분은 분명히 법제화돼서 8·15를 광복절이면서도 건국절로서 모든 사람이 다시 한번 나라를 되새기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대 국회였던 2007년 9월 '광복절'을 '건국절'로 개칭하는 내용의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가 야당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철회했던 정갑윤 의원은 "법제화하는 부분에 대해 국민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더민주는 여권을 헌법에 명기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헌법적 집단'으로 규정해 야권 지지자는 물론 무당층 및 중도층을 끌어안으려고 애썼다. 여기에다 전당대회가 열흘 남은 시점이라 현 정부와 더욱 선명한 대립각을 세우려는 당권 주자들이 역사논쟁에 가세했다.
한 더민주 의원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이 지난 8년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독립운동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듯한 발언을 이어왔는데, 이런 정통성 논란은 내년 대선에서 주요한 이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 전 대표 측은 "박 대통령 경축사에 대한 비판은 인천 자유공원 방문 소회를 밝히는 과정에서 나왔을 뿐 주된 메시지는 아니었다"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건국절 논란이 확산되면서 더민주 당권주자들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 이종걸 후보는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 경축사는) 국헌의 정신과 가치를 문란케 한 것"이라며 "대통령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 당대표가 되면 책임을 물을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김상곤 후보와 추미애 후보 역시 각각 논평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박 대통령 경축사가 항일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이라고 각을 세웠다.
그러나 더민주 지도부가 역사논쟁에서 발을 빼려는 듯한 움직임도 읽혀진다. 이른바 '서별관 청문회' 증인 채택과 누리과정 예산 문제 등 각종 여야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휘발성이 큰 논란에 발이 묶여선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윤해 최승욱 기자 justice@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