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이전 시대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BC 515∼440)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연구로 그리스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철학을 신의 계시에 의존했다고 기록했다. 단순한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그는 진짜로 신이 자신을 가르치고 감동을 주어 철학을 하도록 허락했다고 이해했다. 유사한 사례로 엠페도클레스(BC 490∼430)라는 철학자도 자신의 사고 과정과 철학을 여신에게 의존했다고 말했다. 그리스 철학이 신의 계시를 받았고 이성적 학문 분야의 연구 대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보다 130년 전에 태어났던 이스라엘의 선지자 예레미야(BC 647∼572)의 저작은 어떤가. 예레미야 역시 하나님의 계시를 바탕으로 성경을 썼다. 하지만 오늘날 인문학 분야에서는 구약성서의 예레미야를 이성적 철학책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저 특정 종교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신의 계시에 의지한 그리스 철학은 이성적 학문으로 인정하면서 왜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불합리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책으로 치부될까.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이성과 계시라는 이분법적 굴절 렌즈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지혜는 이성에서 나온 반면 구약성서는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이분법은 하나님 계시의 산물이 한갓 이성의 산물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생겼다. 주로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 의해서다. 그런데 이러한 이분법을 악의적으로 굴절시킨 사람들은 따로 있다. 바로 18세기 말 계몽주의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교회로부터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을 이어받아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위해 리모델링 했다. 그들의 목표는 ‘그리스 사랑’이었다. 오직 그리스인을 유일한 학문적 지식의 원천으로 격상시켰고 기독교 계시는 경멸적 태도와 신랄한 반유대주의를 섞으며 격하시켰다. 그 여파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이다. 성서를 인문학적 문서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됐다.
이 책은 이렇게 오늘날 대학과 지성인 집단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구약성서의 (인문학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집필된 개론서라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구약성서는 실제로 이성적 저서에서 발견되는 방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고대 민족의 역사와 정치적 교훈들, 치국(治國)의 방법과 개인 삶에 대한 탐구, 고난당한 이들의 성찰,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등 헤아릴 수가 없다.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구원 사상, 영생의 약속 같은 주제는 구약성서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 중 4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쯤 되면 성경을 철학과 이성으로 읽자는 저자의 주장이 기독교인 독자들에겐 다소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계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빼앗긴’ 구약성서의 가치를 플라톤이나 홉스의 저작들처럼 읽자는 것이다. 저자는 “구약성서를 계시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이성적 저작으로 읽으면 더 유익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책의 의도는 구약성서를 이성적 저작으로 읽도록 새로운 해석틀을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저자는 해석의 틀로서 구약성서를 세 개의 큰 문학 단위로 나눴다. 창세기부터 열왕기서까지의 연속적 내러티브(이스라엘의 역사서), 선지자들의 설교, 성문서 등이다. 이는 각각 교훈적 내러티브, 선지서들이 내포하고 있는 시와 논증 방식, 법과 언약으로 설명될 수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이와 같은 해석틀을 바탕으로 구약성서의 윤리학과 정치철학, 예레미야의 인식론, 구약성서에서의 진리와 존재, 이성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성과 계시의 이분법은 구약성서에 없는 것”이라며 “이분법적 구분을 완전히 버리고 그런 구분이 발명되기 이전의 이스라엘 선지자들처럼 세상을 이해해보라”고 충고한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구약성서, 인문학 철학서로 읽는다면…
입력 2016-08-17 2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