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정신?… 이젠 즐기며 메달 딴다

입력 2016-08-17 04:16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김우진, 이승윤, 구본찬(왼쪽부터)은 13일 리우데자네이루 이파네마 해변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기보배(뒤)가 지난 11일(현지시간)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삼보드로무 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양궁 개인전 준결승전에서 장혜진에 패한 뒤 따뜻하게 안아주며 축하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상영이 9일 펜싱 남자 에페 결승전에서 대역전극을 펼치며 승리한 뒤 시상대 위에서 두 팔로 하트를 만들며 관중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초속 6m의 강풍이었다.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활이 흔들렸다. 시간에 쫓겨 쏜 1세트 두 번째 화살은 불안하게 날아가더니 3점 과녁에 꽂혔다. 장혜진(29·LH)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대신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3점짜리 화살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중압감을 떨치고 승부를 즐기자 화살들은 속속 과녁 중앙을 꿰뚫었다. 명승부 끝에 패한 기보배(28·광주시청)는 웃는 얼굴로 장혜진을 안아주며 축하했다. 승자의 얼굴도, 패자의 얼굴도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11일 오후(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삼보드로무 경기장에서 열린 두 사람의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준결승전은 달라진 코리안 올림피언의 진면목을 보여준 대표적 장면이었다. 장혜진은 2관왕에 오른 뒤 “순간순간 게임을 즐겼다는 것에 정말 만족하고, 즐김으로써 좋은 결과가 따라왔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제는 즐기는 자의 시대다.

가난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던 과거, 한국은 금메달에 집착했다. 한국 선수가 거구의 유럽 선수를 쓰러뜨리고 금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열광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성취감에 엔도르핀이 샘솟았다. ‘헝그리 파이터’였던 태극전사들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대회 기간 내내 경직돼 있다가 메달을 따고는 눈물을 쏟았다. 지도자들은 선수들을 ‘메달 따는 기계’처럼 대했다.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키고, 때로는 손찌검도 마다하지 않았다. 선수 육성도 한 명의 엘리트에 집착해 ‘올인’하는 방식이었다. 예전 방식을 고수한 여자 핸드볼 대표팀과 유도 남녀 대표팀의 실패가 대표적이다.

이제 그런 시대는 과거의 유물이다. 시대정신은 더 이상 금메달 자체에 열광하지 않는다. 1등만을 기억하지도 않는다. 국민들은 스포츠 자체가 지닌 짜릿한 승부를 즐기면서도, 감동을 빚어내는 글로벌 태극전사를 원한다. 올림픽을 보는 관점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남자 축구가 온두라스와의 8강전에서 0대 1로 패하고, 여자 핸드볼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선 “대한민국 선수들 수고 많았다”는 응원이 쏟아졌다.

미국 사격선수 매튜 에먼스(35)는 메달 복이 없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올림피언이다. 2004 아테네올림픽 사격 남자 50m 소총 3자세(엎드려 쏴·서서 쏴·무릎 쏴) 결선에서 그는 마지막 한 발을 남겼을 때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뒤 깜짝 놀랐다. 어처구니없이 옆 선수의 표적에 명중시키는 바람에 꼴찌로 떨어졌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도 50m 소총 3자세 결선에서 마지막 발을 6점만 쏴도 우승할 수 있었는데, 4.4점을 받았고, 4위로 떨어졌다. 2010년 갑상샘암과 싸워 이긴 뒤 출전한 2012 런던올림픽에서 역시 50m 소총 3자세에서 2위를 달리다 마지막 발이 7.6점에 그쳐 3위에 그쳤다. 그런데도 에먼스는 “시상대에 오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일”이라고 활짝 웃었다. 이번 리우올림픽 50m 소총 3자세에선 예선 19위에 그친 뒤에도 “이 모든 일이 소중한 추억이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를 연출하며 펜싱 남자 에페 정상에 오른 박상영(21·한국체대)은 15일 리우데자네이루의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서 “이 메달은 내가 노력한 대가이지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니까 즐겨 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잘하는 상대를 만나도 긴장하기보다 후회 없이 경기하자고 생각했다”고 했다.

올림픽 메달을 따내지 못했다 해서 비난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 ‘노 메달’이 실패한 인생을 뜻하진 않는다. 태극전사들의 낙천적인 사고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긍정적인 자세는 감동을 자아낸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