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피서지로는 대개 해수욕장을 떠올리지만 더위를 잊는 데는 계곡과 숲이 더 적당하다. 한라산 자락 곳곳에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와 들여다보기만 해도 더위가 달아나는 짙푸른 소(沼)가 숨겨져 있다. 여기에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원시림 상태로 보존된 곶자왈은 하늘을 뒤덮으며 짙은 그늘을 내놓아 ‘녹색 피서’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최근 조성된 신화역사공원 J지구의 탐방로도 찾아보자. 길을 걸으며 제주의 신화와 전설을 읽을 수 있다.
제주의 대표 계곡, 돈내코·안덕 계곡
제주 사람들이 여름철 가장 즐겨 찾는 계곡 중 하나는 돈내코다. 한라산 남쪽 자락을 흐르는 효돈천이 품은 계곡이다. 돈내코는 ‘멧돼지(돈)들이 물을 먹던 하천(내)의 입구(코)’란 뜻으로, 육지의 계곡과 비슷한 풍모를 지녔다.
서귀포시 상효동에 위치한 돈내코 계곡 주변은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다. 햇빛 한점 들어오기 힘들 정도여서 한낮에도 어둑어둑하다. 골짜기를 따라 설치된 나무데크 산책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간 뒤 계곡으로 내려가면 끝에 돈내코 최고의 절경인 원앙폭포가 반긴다. 4∼5m 정도 밖에 안 되는 높이지만 두 줄기로 내리꽂히는 시원한 폭포수는 서늘한 기운을 뿜어낸다.
폭포 아래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비췻빛 소가 자리하고 있다. 폭포와 소의 한기가 몰려와 주변 바위에 걸터앉아 있기만 해도 더위는 저만치 물러간다. 아예 소로 들어가 수영을 즐기는 사람도 여럿이다. 백중날 제주 주민들은 이곳 폭포에서 물을 맞으며 백숙을 즐기곤 했다.
초입에서 왼쪽 산책로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면 바위에 걸터앉아 계류에 발을 담그고 여름의 열기를 식힐 수 있다. 돈내코 계곡 건너편에는 야영장도 들어서 있다.
제주에서 가장 멋진 계곡을 꼽으라면 안덕계곡이다. 올레 9코스의 한 구간으로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마을 인근에 있다. 일주도로 바로 옆이라 찾아가기가 쉽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창고천 계곡의 물길이다.
오랜 세월 흐르는 물이 조각칼로 파낸 듯 깊게 깎아낸 계곡은 양쪽으로 수직 절벽을 병풍처럼 세워 놓았다. 솔잎난·고란초 등 300여종의 희귀식물이 자생해 천연기념물 제377호로 지정됐다. 절벽에는 난대성 상록수림이 울창한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햇빛이 가려져 대낮에도 어둑하다. 그 아래로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른다.
돌하르방이 맞는 입구를 들어서면 높이 12∼13m, 길이 30m 규모의 주상절리대가 먼저 반긴다. 이곳에서 몇 발자국 떼면 선사시대 주거지로 쓰였던 동굴을 만난다. 계곡으로 들어서는 순간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계곡에는 세상과 단절된 듯한 깊은 정적이 흐르고 태고의 신비감이 감돈다.
후박나무 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붉가시나무 등으로 이뤄진 울창한 난대림 아래 계곡의 찰랑거리는 물길은 물놀이를 하기에는 수심이 얕은 편이지만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단위가 즐기기에는 그만이다. 계곡을 따라 걸으면 안덕계곡의 하이라이트가 나타난다. 기둥처럼 떠받친 양쪽의 웅장한 절벽이 소 위에 제 그림을 찍어낸다. TV드라마 배경으로 나오며 반짝 유명세를 치렀던 곳이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감산마을과 만난다. 마을길은 추사 김정희와 연관된 유배길 3코스와 이어진다. 대정에서 유배살이를 했던 김정희도 그 아름다움에 반해 자주 찾았다고 한다. 나무데크는 안덕계곡 풍부한 수량의 비밀인 많은 용출수가 뿜어져 나오는 도고샘까지 뻗어 있다.
숲그늘 가득한 곶자왈, 제주의 역사·문화를 담은 신화역사공원
곶자왈은 해발 200∼400m 중산간 용암의 자갈과 바위들이 널려 있는 지대에 형성된 숲이다. 우리나라 최대 난대림 지대로 식생이 양호하고 하부는 수십 겹의 용암층이 시루떡처럼 쌓여 있어 자연의 숨소리, 역사의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일원에 위치한 ‘제주 곶자왈 도립공원’은 육지 숲의 흙길과 달리 검은 현무암 사이사이에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신비로운 형태의 숲이다. 키가 10∼15m쯤 돼 보이는 종가시나무를 주축으로 참가시나무, 아왜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육박나무 등의 상록활엽수들이 밀도 높은 숲을 이루며 짙푸른 그늘과 시원한 숲의 향기를 내놓는다.
오찬이길과 빌레길, 테우리길(이상 1.5㎞), 가시낭길(1.1㎞), 한수기길(0.9㎞) 등 5개 코스가 서로 연결돼 있는 탐방로는 둘러보는데 약 2시간 30분 걸린다. 한수기오름 입구에서 우마급수장으로 이어지는 테우리길 탐방로를 따라가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테우리는 말몰이꾼의 제주방언. 말몰이꾼들이 주로 다니던 길에서 유래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바로 옆 우마급수장과 멀리 펼쳐진 곶자왈 숲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멀리로는 한라산과 산방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인근에 제주국제자유도시 핵심프로젝트 중 하나인 신화역사공원 내에 제주의 신화와 전설을 주제로 한 탐방로가 조성됐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총 사업비 27억원을 투자해 3.2㎞ 구간에 제주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돌담길 등과 함께 전시·문화 공간, 쉼터 등도 만들었다. 특히 탐방로 쉼터 안에는 제주의 지역별 신화와 전설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서귀포=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