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세원] 보석 같은 삶

입력 2016-08-16 18:46

우리 집은 앞뒤로 산이 있어 시원한 맞바람이 불면 자연바람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면 뜨거운 기운이 훅 느껴져 문 열기도 겁이 나 이제는 정말 무더위와 작별하고 싶다. 시원한 바람이 불 때 뒷베란다에 서면 큰 도로 건너편으로 두 개의 커다란 바위산이 보이고, 한 바위산 아래 내가 졸업한 여고가 보인다. 학교를 볼 때마다 기억으로만 닿을 수 있는 푸르른 여고생의 표상 같은 흰 칼라와 두 갈래로 땋은 머리의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초중고 등하교를 함께한 아주 친한 친구다. 늘 반장을 했던 그 친구를 동창들은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똑똑한 친구로 기억한다. 대형 증권사에서 지점장으로 승진하며 대중매체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본인도 주식 투자로 재산이 엄청 늘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금융위기로 폭락장이 이어지면서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산도 사라지고 투자자에 대한 책임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운전 중에 차를 몰고 강으로 뛰어들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삶의 부조리는 늘 곳곳에 숨어 있다. 재물의 손실이 주는 심리적 파괴력은 엄청나 의지는 꺾이고 무력감으로 정체성을 잃기 쉽다.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버티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 마음에 서늘한 그늘이 가득한 친구가 평안을 찾는 일이 우선인 것 같아 신앙생활을 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지만 언제나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다시피 한 친구가 최근 복지관에서 노래 강사로 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늘 자신만만했던 삶이 탱탱하던 인간관계의 끈을 놓아버릴 만큼 변한 것이다. 아직 미혼인 친구가 고난의 주머니를 차고 홀로 낯선 곳을 걸어야 하는 때에도 끝까지 자신을 믿고 스스로의 편이 되어 회복의 기쁨을 맛보기 바란다. 삶에서 고비를 넘기고 어려움이 끝난 상황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때가 있을까. 날마다 조금씩 소진되어가는 시간 속에서 소소한 일상이 감사로 채워지는 삶이 보석처럼 여겨진다.

글=김세원(에세이스트),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