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누진제 손질” 말로만… 산업부·한전의 복지부동

입력 2016-08-16 04:25

전기요금 누진제를 개편해야 할 주체인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은 4년 내내 ‘말로만’ 누진제를 개선했다. 징벌적 성격의 누진제로 국민 부담은 커져갔지만 정부는 저유가에 따른 한전의 초과수익을 곶감 빼먹듯 빼먹을 궁리만 했다. 에너지 정책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매기지 못한 점이 이번 누진제 파동을 불렀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누진제 파동의 원인은 기록적인 폭염이 아니라 정책 실패에 따른 ‘인재(人災)’라는 지적이다.

누진제 ‘양치기 소년’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19대 국회가 개원한 2013년부터 3차례 국정감사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의원들은 누진제 개선 필요성을 제기했다. 현 기획재정위원장인 새누리당 조경태(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 의원을 비롯해 김성훈 전 새누리당 의원, 이현재 새누리당 의원 등은 누진제 문제점을 설명하고, 윤상직 당시 산업부 장관과 조환익 한전 사장에게 누진제 개선 의향을 물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문제점을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수십 번 약속했다. 윤 전 장관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누진제 완화는 필요하고 그 부분에 대해 정부도 고칠 입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조 사장은 2014년 국감에서는 “내년에는 기필코 이 문제(누진제) 때문에 위원님들이 더 고심하지 않으시게 해드리겠다”고 장담했다.

국감에서 산업위 소속 의원들이 거론한 누진제의 문제점은 올여름 제기된 것과 다를 바 없다. 누진율(최고·최저구간 요금 차)이 11.7배로 지나치게 높고,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 요금폭탄에 노출돼 있다는 내용들이었다. 윤 장관은 누진제가 저소득자 보호가 아니라 1인 고소득 가구에 혜택을 준다는 의견에 대해 “백번 공감한다”며 “전기를 적게 쓰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은 비례하지 않는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올 초 취임한 주형환 산업부 장관도 입장은 다르지 않았다. 주 장관은 지난 1월 인사청문회에서 “기획재정부에서 물가를 담당했던 차관으로 (누진제 개선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고 문제점을 인정했다. 그는 “외국 사례 등 보다 치밀하게 살펴보겠다”고 약속했다.

누진제 논의 외면한 채…

누진제 등 전기요금체계 변경은 법 개정 사안이 아니다. 한전이 전기 공급약관을 고치고, 주무부처인 산업부가 이를 승인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예산이나 세제 개편처럼 국회가 발목 잡을 사안이 아니다. 산업부와 한전이 누진제 개선 의지만 갖고 있었다면 논의를 시작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 구조인 것이다. 정부는 2013년 당정 차원에서 누진제를 현행 6단계에서 3단계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하다가 ‘부자 감세’ 논란에 밀려 접었던 전례 때문에 단독으로 추진하긴 어려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와 한전은 개선 의지조차 없었다. 올 초부터는 “누진제는 ‘일물일가’(一物一價·같은 상품은 어떤 시장에서든지 그 가격이 같아야 한다) 원칙에 위배된다” “개선안이 나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 달라”던 산업부 실무자의 비공식적 의견까지 쏙 들어갔다.

대신 정부는 저유가 탓에 급격히 불어난 한전의 초과수익을 쌈짓돈처럼 빼 쓰는 데 골몰했다. 한전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11조3000억원이었고, 올 상반기에는 6조3000억원이었다. 한전 지분을 보유한 정부와 산업은행은 올해 배당금을 1조원을 넘게 챙겨갔고, 에너지소비효율 1등급 가전제품 인센티브제도 재원 1400억원도 한전의 초과수익으로 마련했다. 기형적인 한전의 수익을 누진제 개편을 통해 국민에게 돌려줄 생각은 아예 없었던 셈이다.

정책 실패, 누가 책임지나

누진제 파동의 단초는 지난달 산업부가 지난해 시행했던 여름철 누진제 한시 완화 방안을 올해는 시행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부터다. 지난해 서민가계 부담 경감을 이유로 한시 완화 방안을 마련한 산업부는 “올해는 서민가계가 나아진 것이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파동의 근본 이유는 산업부와 한전 수장들의 말과 행동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국회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공청회 개최, 연구용역 발주 등 정책적 시도를 하기보다 누진제 개선이 부자감세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논리 뒤에 숨었다.

국회 관계자는 “사회적 논란이 일 수밖에 없는 ‘뜨거운 감자’ 격인 누진제를 건드려봤자 ‘잘해야 본전’이라는 인식이 정부 내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외려 기재부 물가담당 차관 출신으로 누진제를 치밀하게 살펴보겠다고 공언한 주 장관 취임 이후 산업부는 당분간 누진제 개편은 없다고 선언했다. 조 사장은 누진제 여론이 악화된 직후인 지난주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누진제를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뒷북을 쳤다. 하지만 주무부처와 주무기관 수장으로서 누진제 파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윤 전 장관은 고향인 부산에서 여당 공천을 받아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조 사장은 지난해 말 3년 임기를 마치고 1년 연임에 성공했다. 주 장관 역시 정부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세종=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그래픽=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