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얼굴의 사나이가 태극기를 펼쳐놓고 있었다. 14일 오후 5시30분쯤(이하 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파크 카리오카아레나2. 리우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75㎏급 동메달 결정전이 막 끝난 시간이었다. 큰 눈에 눈물이 고인 남자는 태극기 위에 올라가 한국 관중석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김현우(28), 붉은 얼굴은 상대 선수와 경기하느라 서로 부딪혀 생긴 상처투성이였다. 한참 일어나지 못한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치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오늘이 우리 시간으로 광복절이라…태극기를 휘날리고 싶었습니다.”
김현우는 시합이 다 끝났음에도 “후련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되레 경기장 밖으로 발을 떼지 못했다. 기어코 “저보다 더 열심히 운동하고 준비한 사람이 있다면 금메달을 가져가라고 하겠어요. 오직 금메달만 생각하고 훈련했는데 너무 아쉽습니다”라고 했다.
4년 전 런던올림픽 레슬링경기장에서 퉁퉁 부어 피멍이 든 눈으로 매트 위를 한없이 뛰어다니며 승리를 기뻐하던 그 선수다. 레슬링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건 죄다 이뤄낸 사나이.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올림픽, 세계선수권을 모조리 석권하며 ‘그랜드슬램’을 따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김현우의 투혼은 식지 않았다. 69㎏급에서 한 체급 올려 다시 세계 정상에 도전했다. 올림픽 2연패의 각오만으로 지난 시간을 버텼다.
매일 새벽 6시부터 훈련에 돌입했다. 300㎏ 초대형 타이어를 쉼 없이 뒤집었고, 태릉선수촌에서 살다시피 했다. 선수촌 근처 불암산을 내집 드나들 듯 오르고 또 올랐다. 로프 쥐고 흔들기, 26㎏짜리 케틀벨 2개 한꺼번에 돌리기…. 생사의 한계까지 도전한다고 해서 다른 종목 선수들은 ‘사점(死點)훈련’이라고 불렀다. 매일같이 김현우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구토가 나오고 심장이 터질 듯했으며, 공포가 밀려왔다고 한다. 그래도 오직 ‘올림픽 금메달을 다시 한번 따내겠다’는 결심 하나로 버텼다. 밤마다 근육통에 시달리며 잠을 청했고, 아침이 되면 어느새 발걸음은 사점훈련장으로 향해 있었다.
동메달 결정전에 앞서 김현우는 가슴을 쳤다. 2연패 도전을 가로막은 게 상대 선수의 월등한 실력이 아니라 심판들의 편파 판정이어서였다. 16강전에서 그는 로만 블라소프(러시아)에게 3대 6으로 뒤진 경기 막판, 가로들기 기술을 성공시켰다. 상대방이 크게 허공에 떴다가 매트로 떨어져 당연히 4점을 받을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심판은 2점만 부여했다.
대표팀 안한봉 감독과 박치호 코치가 거칠게 항의하며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판정은 1점만 덧붙여졌고, 김현우에게 다시 벌점 1점이 부여됐다.
억울함을 부여잡고 그는 끝까지 싸웠다. 오른팔이 탈골되는 심각한 부상을 안고 동메달 결정전까지 올라갔고, 끝내 보조 스타르체비치(크로아티아)를 6대 4로 제압했다.
한번 올림픽을 제패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성취감 상실의 늪은 김현우에게는 전혀 다가오지 않았다. 되레 두 체급 올림픽 영웅이 돼야겠다는 새로운 성취욕을 자극했을 뿐이다. 레슬링의 규칙까지 바뀌어, 더 큰 체격의 경쟁자들과 전혀 새로운 룰로 싸워야 하는 핸디캡도 그에겐 별로 큰일이 아니었다.
태극기 위에서 오열한 김현우의 눈물 속에는 자신의 인생 전체가 다 들어 있었다. 안 감독은 “투기 종목에서는 한번 정상을 차지해 긴장이 풀리면 다시는 경기장을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게 인지상정”이라며 “마음이 떠나면 몸도 늘어지는 게 당연한데 현우는 이 모든 걸 이겨냈다”고 울먹였다. 옆에 있던 김현우는 “더 많은 노력과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올림픽이 끝나도 은퇴하지 않고 정상에 다시 도전하겠다는 집념의 표현이었다.
김현우는 다친 오른팔을 주머니에 넣고 시상대에 섰다. 시상대에 오르자 편파 판정으로 그를 꺾고 금메달을 차지한 블라소프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중도 장내 아나운서가 김현우를 소개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목에 걸린 동메달 색깔은 금색에 그의 피눈물이 섞인 듯 진해 보였다.
리우데자네이루=모규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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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심’도 못막은 투혼
입력 2016-08-15 17:54 수정 2016-08-15 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