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미국, 일본과 ‘빅3’를 형성하는 세계 스포츠 강국이다. 그러나 30여년 전부터 땀이 아니라 약물로 금메달을 강탈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외면하고 편파판정을 일삼은 정황도 포착됐다. 체제 선전과 경제위기로 인해 흔들리는 체제를 결속하기 위해 이 같은 ‘더티 플레이’를 저질러 온 것이다. ‘러시아 마피아’의 검은 구름 아래 국제 스포츠계 전체가 흔들리는 모양새다.
뉴욕타임스는 14일(현지시간) 소련(현 러시아) 스포츠 담당 공무원이 작성한 금지약물 투약 지시 문서를 공개했다. 1983년 11월 24일 작성된 문서에는 “최고의 선수들에게 세 종류의 스테로이드를 주사해야 한다”는 내용의 노골적 도핑 지시가 들어 있었다. 다음해 열릴 1984 LA올림픽 우승을 위한 것으로, 육상 대표팀 코치에게 보내졌다.
이로써 러시아 정부가 30여년 전부터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선수들에게 금지약물을 투여해 온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최근 불거진 ‘도핑 스캔들’이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조직적·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정부 차원의 프로그램일 개연성이 더욱 뚜렷해진 것이다.
문서는 당시 소련 스포츠팀 의사였던 세르게이 포르투갈로프 명의로 돼 있다. 포르투갈로프는 2014년부터 불거진 러시아 도핑 의혹의 핵심 인물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문서를 공개한 그리고리 보로비에프(86) 박사는 30년 이상 소련 육상팀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그는 5년 전 건강이 악화돼 러시아 모스크바를 떠나 아들과 손자들이 살고 있는 미국 시카고로 건너갔다.
보로비에프 박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1970년대 그가 관리하던 수백 명의 소련 선수들이 경기력을 높일 수 있는 약물을 찾았다”며 “특히 국제대회에 출전한 후 더 심했다. 약물을 찾는 선수들에게는 가능한 한 적은 양을 복용하라고 권했다”고 밝혔다. 이어 “선수들에게 약물을 과다 복용하면 목소리가 변할 수 있으니 이를 잘 관찰하라고 충고했다”고 덧붙였다. 소련 선수들은 약물을 복용하지 않아 성적이 떨어지면 대표팀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할 뻔했다. 2년 전 소치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최근 5년간 열린 각종 국제대회에서 선수들의 도핑을 조직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특정 종목을 제외하고 사실상 러시아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의 밀접한 관계가 배후에 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외신들은 바흐 위원장을 ‘푸틴의 개’라며 비난했다. 러시아 선수들은 리우올림픽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경기를 해야 했다.
러시아는 약물뿐만 아니라 편파판정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리우올림픽 레슬링과 펜싱 등에서 러시아에 유리한 이상한 판정이 잇따랐다. 러시아와 구 소련 출신 고위급들과 심판진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한국의 김현우(28·레슬링)와 전희숙(32·펜싱)은 러시아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편파판정의 희생양이 됐다.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26)가 당한 편파판정도 돌이켜보면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김연아는 여자 피겨스케이팅에서 개최국인 러시아의 소트니코바에게 믿기 힘든 패배를 당한 바 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오른 소트니코바는 다음날 열린 프리스케이팅에서 편파판정 논란 끝에 김연아를 제치고 금메달을 땄다. 당시 심판들 중에 러시아피겨협회장의 부인과 예전에 판정 시비로 자격정지를 당했던 사람이 포함됐다. 테크니컬 패널 또한 러시아피겨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러시아인이 맡아 심판진이 소트니코바에게 고의로 높은 점수를 준 것이라는 논란이 일었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세계 스포츠계 뒤흔드는 ‘러피아’의 검은 구름
입력 2016-08-16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