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직 <7> 불의의 교통사고… 둘째 잃고 술·담배에 빠져

입력 2016-08-15 19:30 수정 2016-08-15 21:07
이상직 전 의원 가족사진. 아내와 막내아들, 맏딸, 이 전 의원(왼쪽부터).

현대증권 입사 후엔 고된 야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24시간 동안 일만 생각했다. 일하는 꿈만 꿔도 왠지 즐거웠다. 재야의 투자 고수를 찾아가 한 수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아무리 두꺼운 책도 밤새 읽어가면서 노력했다. 이런 열정으로 증권협회 교육성적 1등을 차지했고 신설 점포를 매번 전국 1등 점포로 만들어 업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 무렵 주변에서 현대증권 노조위원장에 나서라는 강력한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아 입사 동기를 추천했다. 그리고 그의 노조위원장 당선을 위해 앞장서 뛰었다. 친구가 당선되자 나는 노조의 체육부장을 맡았다. 노조원들과 주말마다 축구를 하면서 팀워크을 다졌다. 풍물패도 만들어 노조의 단합을 위해 몸으로 뛰었다. 그런데 “노조위원장 위에 이상직”이라는 뒷말이 들렸다. 허탈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축구로 인해 검게 그을린 얼굴을 두고는 “골프를 많이 쳐서 얼굴이 탔다. 임원급 대리 나셨다”고 비아냥거리기는 소리도 들렸다. 사실이 아니기에 개의치 않았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정말 힘든 시련이 찾아왔다.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간 아내로부터 서울로 출발한다는 전화를 받고나서 두 시간 뒤 낯선 사람의 전화가 걸려왔다. 상경하던 중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차가 뒤집혔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상에 누워있는 두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아내와 첫째 딸아이는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둘째인 아들은 상태가 위중했다.

나와 너무도 닮아 모두가 ‘리틀 이상직’이라고 했던 그 아들은 일주일 뒤에 천국으로 떠났다. 아침마다 “회사 잘 다녀오세요”라며 인사해주던 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우리 가족은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세상 모든 일이 싫어졌고 오로지 술만 마셨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슬픔은 세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지금도 그 슬픔은 잊혀지지를 않는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 그 애절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아들을 잃은 아픔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팽목항에서 마음속으로 통곡을 하며, 천국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자녀들을 가슴에 묻은 유가족들을 위해 가장 슬픈 기도를 올렸다.

나는 가끔 학교에서 강연을 하곤 한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요청은 거절한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할 때도 말을 잘하는 강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강연을 하는 이유는 훌쩍 떠나버린 둘째 아이 때문이다. 강의를 할 때마다 ‘그 녀석이 계속 성장했다면 지금쯤 이 학생들과 친구가 됐을 텐데’ ‘둘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등 많은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꿈은 소중하다. 맨주먹일지라도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라는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어 강연에 나선다. 지금 내겐 둘째인 셋째 아들이 있다. 둘째가 떠나고 몇 년 뒤에 태어난 아들은 무탈하게 잘 성장하고 있다.

인생의 굴곡이 없을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알게 된 후로는 그동안 내게 주어졌던 견디기 힘든 모든 시련들이 나를 굳세고 단단하게 단련하시려는 계획임을 믿는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