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산 북쪽 기슭은 목포 원도심이다. 북촌이라 불렀다. 반대편 남촌은 개항장이다. 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목포기독교회 등이 밀집한 남촌이다. 목포 유달산 북쪽기슭 북촌에 한인이 살고 개항장 남촌에 일인이 살았다. 행정명 역시 북촌은 동(洞)이라 하고 남촌은 마찌(町)라 했다.
동은 원래 무덤자리다. 일인들에게 밀려 갈 곳이 없었던 목포사람들이 터 잡은 곳이다. 1897년 고종 황제가 칙령을 내려 목포를 개항한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899년 목포선교부를 바로 이 동 지역에 개설한다. 양동교회,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선교사 사택 양관, 프렌치병원. 무덤자리가 생명자리로 다시 태어난다.
마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목포주재 일본영사 와카마쓰 도사부로는 1927년 일본 교토로 돌아간다. 일경은 1935년 조선인들이 세운 교토교회를 폐쇄하고 특별 감시한다. 와카마쓰는 일경을 설득해 재일 조선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돕는다. 시인 윤동주도 일본 유학시절 이 교회에 출석한다. 와카마쓰 도사부로는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도시샤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목포주재 일본영사 시절 와카마쓰는 미국산 육지면을 보급하여 우리 농민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천일염 제조법을 보급해 적은 비용으로 많은 소금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
유달산 넘어 대반동 부광상회 아래로 골목길을 계속 걸어가면 신안비치호텔이 눈앞에 보이는 해안도로에 이른다. 여기에서 왼쪽은 따뜻한 유달산 남쪽기슭 다순구미, 오른쪽은 공생원이다. 윤치호 전도사가 다리 밑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7명의 고아를 발견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공생원이 출발한다. 그 때가 1928년이다. 고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명여학교 음악교사 다우치치즈꼬도 손을 보탠다. 모두 3000명이 넘는 고아를 길러낸다.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고, 한인교회 목포양동교회와 일인교회 목포기독교회로 나뉘었다. 그러나 다순구미 공생원에서 한인과 일인은 서로 힘을 모았다. 신앙은 나라와 민족을 나누지 않았다.
최석호<목사·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최석호의 골목길 순례자-목포 북촌과 남촌] 일제 강점기 신앙의 역사 숨 쉬는 곳
입력 2016-08-12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