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직 <5> 친구가 항공대 원서 접수비 술값으로 탕진

입력 2016-08-11 20:05
동국대 재학 시절 전주고 동창들과 찍은 사진. 오른쪽 기타를 매고 있는 이가 이상직 전 의원.

나라의 미래와 운명은 교육을 통해서 달라지는 법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의 정점에는 대학입시제도가 있다. 그런데 이 대학입시제도 만큼 자주 바뀌는 것도 드물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려고 하던 당시에도 그랬다.

나는 전주고등학교에 다녔다. 1978년 입학할 당시 경기고 경북고 부산고 광주일고 등 전국의 명문고교들이 대부분 평준화가 됐다. 비평준화 고교 가운데 전주고는 전국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혔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 중에 서울대만 200명가량 합격했다.

훗날 동기 중 의사가 된 친구가 2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해도 35명이나 될 만큼 머리 좋은 이들이 많았고, 공부 경쟁이 뜨거웠다. 나를 비롯해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 본고사를 겨냥해 국어 영어 수학에 집중했다. 스스로 수학에 강하다고 자부한 만큼 소위 ‘SKY’라 불리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진학을 꿈꿨다. 그런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고3이었던 1980년 5월 광주를 유혈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정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제도를 바꿨다. 그중 하나가 교육이었고, 핵심은 물론 대학입시제도의 개혁이었다. 본고사를 폐지하고 예비고사 성적과 내신 성적만으로 대학 입시를 치른다는 것이었다. 대학입시를 불과 4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는 사전 예고조차 없이 발표됐다.

국·영·수를 중심으로 본고사 준비에 매달린 채 내신 성적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나와 친구들은 모두 요즘말로 ‘멘붕(멘탈붕괴)’ 상태가 됐다. 더구나 중국집 주방장이 되겠다면서 가출했던 그 시간동안 시험을 치르지 않았던 나는 내신 성적이 꼴찌 등급이었다. 결국 81년 대학입시는 극심한 눈치작전이 펼쳐졌다. 이때 고교를 졸업한 소위 ‘81학번’들은 모두 신군부 교육개혁의 피해자이다.

나는 일단 전북대 농대 81학번으로 입학했다. 농사나 농업에 대한 꿈이 없었던 탓에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옛집으로 돌아가 다시 몇 달간 공부를 했다. 학력고사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올렸지만 평소 원했던 대학은 갈 수 없었다. 꼴찌등급 고교 내신이 계속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1차 진로를 ‘꿈’으로 정했다. 어릴 적에 고향에서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가졌던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졌다. 그래서 항공대 진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시력이 문제였다. 결국 항공운항 대신 항공경영을 선택하기로 했다.

당시 수중에는 원서를 접수할 정도의 돈밖에 없었다.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원서 접수를 부탁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의 믿음을 배신했다. 그는 항공대 접수 비용을 자신의 술값으로 날렸고, 복수지원으로 선택했던 동국대 경영학과에만 접수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동국대가 등록금을 면제해준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이스타항공의 창업주가 됐다. 파일럿이 됐다면 항공사 창업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경영학을 공부한 것이 오히려 큰 도움이 됐다. 항공대 입학원서를 술과 바꿔먹은 친구가 원망스러웠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이런 사건들 역시 내 삶을 운용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인 것 같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