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해방 후 정치인 암살… 어른대는 친일파의 그림자

입력 2016-08-11 17:39

1945년 해방부터 1948년 정부 수립까지 이른바 ‘해방공간’에서는 정치적 암살이 횡행했다.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각했던 1947년 하반기의 테러 기록을 보면, 7월 128건, 8월 68건, 9월 50건, 10월 45건, 11월 40건, 12월 63건이었다. 현대사 연구자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남북문제 전문가 정창현씨가 함께 쓴 이 책은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다섯 건의 정치 지도자 암살사건을 집중 분석한다.

1945년 9월 3일 평양 시내에서 백관옥에게 암살된 평양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현준혁,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한현우 등에게 자택에서 피살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저격당한 근로인민당 당수 여운형, 1947년 12월 2일 제기동 자택에서 박광옥 등에게 피살된 한국민주당의 실세 장덕수,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피살당한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핵심 정치인들이었다. 또 이 사건들은 7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암살의 배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인 암살은 흔히 좌우익의 대립에서 빚어진 비극 정도로 파악돼 왔다. 필자들은 이 책에서 다섯 건의 암살사건에서 추출되는 몇 가지 공통점을 근거로 친일파가 암살의 배후가 아니었나 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다섯 건의 암살사건에는 항상 ‘백의사’란 청년 테러단체가 등장했다. 또 경찰이나 군 고위 관계자들이 암살범의 배후로 지목됐고, 그 위로 이승만이나 김구 연루설이 매번 거론됐다. 필자들은 암살사건의 중심에 경찰과 군이 있었고, 당시 경찰과 군대의 고위 간부들 대부분이 친일 경력자였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해방이 되었지만 청산되지 않고 재등용된 친일파가 해방정국의 비극적인 정치 암살을 가져온 배경이라고 하면 너무 과도한 결론일까?”라고 묻는다. 또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암살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자를 일벌백계했다면 1956년의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1973년의 김대중 납치 암살 시도, 1975년 장준하 의문사사건 등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