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힘… 기적을 찌르다

입력 2016-08-11 04:06
한국 펜싱 대표팀의 막내 박상영이 9일 밤(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카리오카 아레나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펜싱 남자 에페 결승전에서 승리한 뒤 두 팔을 들며 환호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상영이 결승전 2라운드 후 휴식시간에 '나는 할 수 있다'는 혼잣말을 하며 결의를 다지는 모습.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그래,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후∼) 할 수 있다.” 9일 밤(현지시간) 2016 리우올림픽 펜싱 남자 에페 개인전 결승 경기가 열린 리우데자네이루 카리오카 아레나. 한국 대표팀 막내 박상영(21·한국체대)은 계속 이 말을 되뇌고 있었다. 2피리어드가 끝난 뒤 잠시 의자에 앉아 쉬는 시간이었다. 스코어는 9-13. 상대방인 게자 임레(42·헝가리)에게 두 점만 더 빼앗기면 바로 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박상영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비웠다. 비어진 머리에 오로지 이길 수 있다는 긍정의 생각만 주문 걸 듯 채우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임레를 15대 14, 한 점 차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4점을 뒤진 상황에서 내리 5점을 따내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대역전극을 펼친 것이다. 한국 에페 사상 첫 금메달의 기적은 그렇게 완성됐다.

무명 박상영에게 ‘고난이 복이었다’

대회 전 박상영을 금메달 후보로 지목한 이는 없었다. 지난해 3월 왼쪽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고, 대표팀 복귀도 지난 4월에야 이뤄졌다. 앞뒤로 움직임이 많은 펜싱 선수에게 이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박상영은 이제 끝났다”라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도 선수생활 포기를 떠올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무릎 꿇는 일’ 대신 아픔을 헤치고 일어섰다. 펜싱일지에 매일같이 ‘개구리도 도약하려면 다리를 구부린다’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시기다’라는 말을 적었다. 힘들고 지루한 재활의 시간도 그는 발전의 기회로 삼았다. 조급해하지도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단점으로 지적됐던 앞발과 뒷발 밸런스를 맞추는 데 전념했다.

최악의 시련은 값진 원동력이 됐다. 임레에게 10-14로 몰린 극한의 상황에서 그간 겪었던 고난의 시간은 진가를 발휘했다. 1점만 더 주면 모든 게 끝이었고, 동시타가 인정되는 에페 경기에서 상대를 14점에 묶어두고 쫓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상대는 나이 42세의 백전노장이었다. 조종형 펜싱대표팀 총감독조차 체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박상영은 달랐다. 오히려 ‘지금 너무 급해. 침착하게 수비부터 신경 쓰자.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올 때 빈틈이 있을 거야’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박상영은 1점을 따기 위해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을 막고 주특기 ‘플래쉬(날아서 찌르기)’를 앞세워 반격했다. 박상영의 스피드에 임레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근차근 포인트를 따내더니 결국 대형 사고를 쳤다.

즐기는 자에게 랭킹은 의미 없다.

박상영이 결승에서 맞붙은 임레는 1996 애틀랜타올림픽 동메달, 2004 아테네올림픽 은메달에 빛나는 ‘전설’이다. 박상영이 첫돌을 맞았을 때 이미 임레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 펜싱 경력만 30년에 가깝다. 반면 박상영은 진주제일중 1학년 때인 2008년 펜싱을 처음 시작했다. 10년이 채 안 된다. 그런데 박상영에겐 다른 선수들이 갖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펜싱을 즐긴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데뷔 후 2년간 6차례 대회에 출전했지만 순위권에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펜싱을 하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잘하고 싶었다. 연습벌레가 된 계기다. 중3 때부터 결과로 나타났다. 각종 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소년체전 최우수선수상, 2014년 아시아선수권 단체전 금메달, 세계선수권 단체전 은메달, 인천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다. 승승장구였다.

박상영은 올 시즌 세계랭킹 21위. 그가 이번 올림픽에서 물리친 선수들은 전부 자신보다 높은 랭커다. 대회 첫 경기 세계랭킹 19위 파벨 수호프(러시아)를 시작으로 16강에서 랭킹 2위 엔리코 가로조(이탈리아)를 잡았다. 8강에서 10위 막스 헤인저(스위스)를 15대 4로 꺾은 그는 준결승도 13위 벤야민 슈테펜(스위스)을 맞아 15대 9로 승리했다. 결승에서 꺾은 임레는 랭킹 3위다. 박상영에게 이런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가 대회 전 올린 페이스북에는 ‘올림픽=제일 재밌는 놀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야말로 원 없이 올림픽을 즐긴 것이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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