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언에 맞서라, 되받아쳐라

입력 2016-08-10 19:31
주디스 버틀러
동시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60·미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교수·사진)의 책 두 권이 나란히 번역됐다. 1997년작 ‘혐오 발언’(알렙)과 2012년작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시대의창)이다.

‘혐오 발언’은 20년 가까운 시차를 건너 국내에 소개되는 것이지만 일베, 메갈리아, 여혐, 한남충, 개 돼지 발언, 퀴어축제 논란, 장애인 비하 등 혐오 발언이 난무하는 2016년 한국 사회의 흐름에 부합한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혐오 발언에 대한 아주 낯설고 논쟁적인 사유를 보여준다. 그는 혐오 발언이 그 자체로 폭력이며, 국가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는 피해와 상처, 공포의 관점에서만 혐오 발언을 바라보는 태도에 질문을 던지면서, 혐오 발언이 품고 있는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혐오 발언은 그 말을 건네받은 자에게 직접적이거나 인과적으로 영향을 주는가? 혐오 발언은 상처를 주는 것 외에 다른 의미나 힘, 효과를 가질 수는 없는가? 혐오 발언자는 얼마나 권력을 갖고 있으며 그 사람만 처벌하면 혐오 발언이 사라지는가? 버틀러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혐오 발언이 무슨 막강한 힘이나 ‘마법적 효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그는 언어는 화자가 의도한 대로 타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게 아니며, 발언과 행위, 언어와 효과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가 이 간격, 혹은 차이에 주목하는 이유는 발언(언어)이 갖는 취약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말이란 건 그대로 행위 되는 게 아니다. 청자에 의해 변화되거나 탈선될 수 있다. 그는 특히 상처를 주고자 하는 말들이 자신들의 기호를 상실하며 의도된 것과 반대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이 원래의 목적과 반대로 ‘재사용’된 예로 ‘퀴어(queer)’라는 용어를 꼽는다. 이 말은 애초 성소수자에 대한 비하나 혐오의 의도로 사용됐으나 지금은 동성애 운동의 상징으로 재전유돼 쓰이고 있다. 그는 “행위와 상처 간에는 저항의 장소로 활용될 수 있는 잠재적 간격이 존재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되받아쳐 말하기가 가능해진다”면서 “상처를 주는 말은 그것이 작동했던 과거의 영토를 파괴하는 재배치 속에서 저항의 도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이런 주장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커뮤니티 메갈리아의 미러링 전략에 대한 이론적 옹호로도 읽힐 수 있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 대한 이러한 반란적 되받아쳐 말하기, 기생적인 말하기는 역설적이게도 역으로 혐오 발언자나 포르노그래피를 침묵시킬 수도 있다”며 미러링의 핵심인 되받아치기를 적극적으로 주문한다.

버틀러는 1990년 ‘젠더 트러블’이라는 논쟁적 저서를 시작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로 자리 잡았다. 본래 전공은 철학과 수사학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정치적 사회적 발언을 많이 하면서 현실참여적 운동가, 정치이론가의 면모도 보인다.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버틀러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발언한 내용을 모은 그의 최신작이다. 유대계 미국인인 버틀러가 이 세계의 가장 뜨거운 문제를 놓고 용감하면서도 비범한 논쟁을 제기한다.

출판계에선 지난해 시작된 페미니즘 바람이 버틀러 읽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전망하고 있다. “지젝 이후엔 버틀러”라는 말도 나온다. 국내 20∼30대 여성 연구자들 사이에서 버틀러 열풍은 이미 뜨겁다. 버틀러는 난해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번에 나온 두 책은 버틀러의 책 중에서는 쉬운 편에 속한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