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활동을 하신 증조부의 영향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죽을 뻔한 조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조부는 일본군을 피해 지리산에 숨어살았다. 그렇게 10년 동안 칩거하다 산에서 내려와 ‘지천명’의 나이 50세에 첫 아들을 낳으니 나의 부친이다. 훗날 부친은 “서쪽으로 가라”는 조부의 유언에 따라 지리산에서 전북 김제 금산면으로 동생과 가족을 이끌고 이사했다.
아버지는 나전칠기 사업으로 크게 자수성가했다. 덕분에 첫째, 둘째 형들은 서울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1970년대 초반 가업을 큰형님에게 물려주시고는 다시 김제 금산면에 터를 잡으시고 김제 만경 광활에서 농사를 지었다.
70년대 후반 가구시장의 풍토는 서양식 목재가구가 주를 이루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큰형님이 물려받은 가업은 실패했고, 집안 전체가 기울었다.
부친의 나이 마흔 다섯에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김제 금산면 원평초와 금산초를 다니다가 6학년 때 전주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러면서 전주에 계시던 큰형님 댁에서 머물렀다. 집안도 기울어진 마당에 형 집에서라도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마음 한구석엔 찬밥신세가 된 것 같아 서럽기도 했다. 그렇게 중앙초와 전라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창 미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불러서 “김제 광활에 와서 농사일을 돕는 게 어떠냐”고 어렵게 말씀하셨다. 이 무렵 큰형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게 어떠냐”면서 넌지시 내게 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명문 전주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나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큰형님은 6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는 조카들 틈에 끼어 생활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무작정 그 집에서 나오고 싶어졌다. 그러다 어릴 적 친하게 지냈던 고향 형을 우연히 시내에서 만났다. 익산에 있는 중화 요리집에서 주방장으로 일한다고 했다. 그 길로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돼지 저금통을 털어 익산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린 내 눈에는 농사일보다 중국집 주방장이 훨씬 더 멋져 보였다. 자장면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후회가 밀려왔다. 손님이 밀리면 그릇을 다 씻기도 전에 다시 자장면을 담아야 했다. 손님들이 배달가방을 든 형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싫었다. 결국 중국집 주방장도 일단 대학을 나온 후에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가게 앞에 나를 찾아 온 큰형수의 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큰형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만감이 교차했다.
예전에 TV 광고에서 유행했던 말처럼 정말 ‘집 나가면 개고생’을 경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이런 난관들조차도 훗날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단련시키신 게 아닌가 싶다. 대가족 틈바구니에서 눈칫밥도 먹어보고 가출해서 고생도 해봤다. 이런 경험들이 없었다면 꿈을 이루기 전에 조금만 힘들어도 주저앉아버렸을지 모른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확실하게 느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역경의 열매] 이상직 <3> 어려서 겪은 여러 난관,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
입력 2016-08-09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