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직 <2> 할아버지, 일본군에 처형 직전 살아나는 은혜

입력 2016-08-08 20:26
이상직 전 의원 큰형의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 왼쪽이 이 전 의원 어머니, 그 옆이 아버지.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가 이 전 의원.

4년의 국회 의정활동 가운데 많은 일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2014년 국무총리 인사청문회가 떠오른다. 당시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가 독립운동가 문남규 선생이 맞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었는데, 내겐 특별한 기억이다.

나의 증조부는 구한말 무장 의병전쟁에 관여한 독립운동가였다. 1905년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들이 을사늑약을 맺고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자 병조참의 벼슬을 살던 증조부 죽포 이규현 선생은 의병거사에 뜻을 함께하기로 한다. 그는 보관하던 병참물품들을 아무도 모르게 다락 뒤주에 숨겨두었다. 나락 마흔 섬을 퍼내고 그 속에 총을 숨겼던 증조부는 지리산 호랑이로 불리던 독립운동가 석상용을 만나 총을 건넸다. 안타깝게도 당시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전쟁에 뜻을 함께한 의인 113명의 명단을 기록한 ‘동맹록(同盟錄)’에 증조부의 이름이 남아있다.

당시 증조부의 활동은 일본군에게 알려졌고 일본군은 연로하신 증조부 대신 장남을 잡아가 죽이겠다고 했다.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을 걱정해 아들을 피신시키자 일본군은 가족을 찾아와 매일같이 행패를 부리며 집안을 몰살시키겠다고 겁박했다. 이때 셋째인 나의 조부 이종식이 나서 “이미 도망간 큰형님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오. 형 대신 나를 데려가고 이제 그만 행패를 멈추라”고 말했다. 조부는 일본군에 끌려갔다.

당시 일본군은 전라도에 남원·군산·광주부대 등 세 부대가 있었다. 특히 남원부대는 지리산 일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의병들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 붙잡힌 의병들은 남원 실상사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조부가 실상사에 가보니 일본군의 가혹한 고문에 병색이 짙어진 사형수 네 명이 있었다. 실상사 마당에는 꽤나 잘 차려진 점심밥상이 준비됐고, 일본군은 “이게 마지막 밥이다. 귀신도 배가 불러야 잘 간다더라”며 그들을 조롱했다. 때마침 그곳에 있던 일본군 앞잡이 중에 이전에 조부와 남원 인월장 주막에서 만나 술을 마시면서 호형호제를 약속한 건달이 있었다. 그 건달이 일본군을 설득해 조부는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조부는 근 10년간 지리산 금대암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다. 해방 이후에 지리산에서 나왔고, 그 후 태어난 부친이 조부의 뜻을 받들어 김제 금산면 모악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8남매 가운데 늦둥이 막내로 내가 태어났다. 부친의 호는 적선(積善)인데, 그 뜻대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다 작고하셨다.

돌이켜 보니 나의 뿌리부터 현재의 내 모습으로 이어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뤄진 것임을 깨닫는다. 우선 조부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형 대신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것부터 은혜다. 우리 가족이 지리산에서 피신하다가 큰형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후 김제 금산면 용화부락으로 가족들이 이사를 오게 된 것도 의미가 있다. 금산에는 조세형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조부 조덕삼 선생께서 설립한 일명 ‘ㄱ’자 교회인 금산교회가 있었다. 나는 늦둥이에 막내로 태어나 어렵게 자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샐러리맨과 중소기업 CEO, 이스타항공 창업까지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