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호모 네트워쿠스’ 시대의 집회… 민중가요·주동자 없다

입력 2016-08-08 04:00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줄게∼”

지난 3일 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 졸업생 5000여명(경찰 추산)이 플래시가 켜진 휴대전화를 들고 모여들었다. 대학 본관에서 일주일째 점거농성을 하는 후배들을 격려하는 집회였다. 누군가 선창을 하자 하나둘 그룹 지오디(god)의 ‘촛불 하나’를 따라 불렀다. 긴장감이 팽팽하던 공간에 이내 색다른 공기가 돌았다.

‘익명의 다수’가 온라인상에서 ‘집단 공감’하고 오프라인에서 결집하는 새로운 집회·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외부인을 배제하는 ‘대안 집회’도 등장하고 있다.

이화여대 학생들의 점거농성 현장에 ‘주동자(혹은 주동모임)’나 ‘민중가요’는 없었다. 그 빈자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대중가요’가 채웠다. 서울지하철 구의역 사고 추모행렬,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집회, 경북 성주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반대 집회도 비슷했다.

호모 네트워쿠스(Homo Networcus)

이화여대 점거농성 계획은 동문 커뮤니티인 ‘이화이언’의 익명게시판 ‘비밀의 화원’에서 구체화됐다. 곧바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에 ‘Save Our Ewha(우리 이화를 살려주세요)’라는 계정이 만들어졌고, 점거농성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온라인 행동’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게 처음은 아니다. 지난 5월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를 기리던 10번 출구 앞 추모 행사, 서울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희생자 김모(19)군 추모 열기도 그랬다.

이런 집단행동에는 ‘주동자’가 없다. 특정 단체나 세력이 아닌 익명의 개인들이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커뮤니티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다. 이 때문에 SNS에 친숙한 ‘호모 네트워쿠스(Homo Networcus)’ 세대의 집회 풍속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7일 “공감은 행동의 직전 단계인데 SNS가 둘 사이의 징검다리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한동섭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강남역, 구의역, 이대 사태처럼 의견을 표현하기에 부담이 적은 비교적 단순한 사안일수록 SNS의 효과가 크다”고 덧붙였다.

‘투쟁’의 색깔을 빼다

현장 풍경도 색다르다. 이화여대 본관을 점거한 재학생들은 농성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졸업생들은 재학생을 대상으로 진로상담이나 심리치료 등 재능 기부를 했다. 지난달 30일 본관에 경찰 1600명이 배치됐을 때 농성 중이던 학생들은 아이돌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러 화제를 모았다. 앞서 경북 성주 군민들도 대중가요나 동요 가사를 사드 반대 내용으로 개사해 불렀다. 민중가요로 대표되는 ‘투쟁’의 색깔이 빠진 것이다.

이화여대 농성에는 외부단체나 학생운동 세력의 개입도 없었다. 재학생, 졸업생 중에서도 ‘다른 목적’이 없는 당사자들만 모였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언론, 의료, 물자, 법률자문 등의 역할을 분담했다. 게시판에서 모든 사안을 투표하고 성명서도 매번 ‘집단 탈고’했다. ‘느린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부인 거른 ‘대안집회’

‘대안형 집회’는 기존 집회가 되레 사태를 악화시킨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측면이 강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나 대학처럼 거대한 대상과의 갈등 상황에선 여론 의존도가 높은데, 식상하고 판에 박힌 집회는 제3자에게 호의적으로 다가가기 힘들다”고 말했다.

성주 군민의 사드 반대 집회가 철저하게 외부인을 차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달 21일 서울역광장에 모인 성주 군민들은 파란 리본을 달아 ‘신분’을 확인한 뒤 평화집회를 진행했다. 이상원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불법 없이 주장을 충분히 펼치는 선진 집회 문화의 시발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화여대 학생들의 ‘배제 전략’이 지나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집회의 성격이 왜곡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세월호 ‘노란 리본’ 등의 착용까지 금지했다. 한 학생은 “순수성에 대한 논의가 또 다른 폭력으로 느껴졌다”는 대자보를 붙이기도 했다.

‘연대(連帶) 의식’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 이병훈 교수는 “너는 안 되고 나만 옳다는 식이라면 또 다른 논란을 낳을 수 있다”며 “새로운 방식으로 연대를 실천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수민 오주환 임주언 기자 suminism@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