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올림픽, 아는 만큼 보인다 <9> 탁구] 태극남매, 12년 만에 만리장성 넘는다

입력 2016-08-03 17:38
한국 여자탁구 국가대표 서효원이 1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리우센트로 파빌리온에서 연습훈련을 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지름 4㎝ 무게 2.7g. 탁구공은 올림픽 구기종목에 사용되는 공인구 중에서 가장 작고 가볍다. 그럼에도 선수들이 메다꽂는 스매시의 속도는 시속 110㎞에 이른다. 탁구공이 전하는 긴장감과 선수들의 환상적인 랠리는 탁구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탁구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19세기말 인도나 남아프리카 등 식민지에 살던 영국 장교들이 식사 후 오락거리로 고안한 놀이가 탁구의 시초다. 그들은 더운 날씨 때문에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필요했다. 탁구를 위한 테이블, 라켓, 공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직사각형의 넓은 나무책상 가운데 지점에 두꺼운 책을 네트 삼아 세웠다. 와인병 코르크마개를 깎아 공으로 사용했다. 프라이팬이나 나무판자 조각이 라켓을 대신했다. ‘고시마’ ‘워프워프’ ‘프림프림’ 등 이 놀이를 일컫는 말도 다양했다.

1898년 영국의 크로스컨트리 선수 제임스 깁은 셀룰로이드 소재의 장난감 공을 놀이에 사용했다. 쇠가죽을 덧 댄 라켓과 셀룰로이드 공이 닿을 때마다 핑(ping), 퐁(pong) 소리가 난다고 해서 ‘핑퐁’이란 이름이 붙었다.

탁구는 셀룰로이드 공 도입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럽 전역에 보급됐다. 1902년 영국에서 탁구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고무재질의 러버(rubber)가 라켓에 쓰이면서 다양한 기술들이 등장했다. 1923년부터는 영국의 테니스에서 착안했다는 이유로 핑퐁 대신 ‘테이블 테니스(Table Tennis)’라 불리게 됐다. 1926년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탁구연맹(ITTF)이 발족됐고, 이듬해 영국 런던에서 사상 첫 유럽선수권대회가 개최됐다. 1930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면서 탁구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탁구는 최초 유럽에서 전파됐지만 현재 탁구 최강국은 중국이다. 이는 마오쩌둥이 중국의 스포츠로 탁구를 선택하면서 급속도로 대중화된 영향이 크다. 중국 각 도시 곳곳에는 탁구 테이블이 보급됐다. 탁구는 좁은 공간에서도 라켓과 공만 있으면 즐길 수 있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안성맞춤이었다. 이후 중국은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보이는 실력파 선수들을 대거 배출했다. 중국선수로는 롱궈투안이 195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중국 전역은 탁구 열기에 휩싸였다.

탁구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이후 28개의 금메달 중 24개를 중국이 가져갔다. 때문에 중국 탁구에 대한 견제가 시작됐다. ITTF는 2001년 기존 21점제에서 11점제로 규칙을 바꿨다. 공인구의 크기도 지름 3.8㎝에서 4㎝로 커졌다. 지난해 7월부터 도입된 플라스틱 공인구는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올림픽 첫 선을 보인다.

한국은 역대 올림픽 탁구에서 금메달 3개로 중국의 뒤를 잇고 있다. 1988년 서울 대회 여자복식 양영자 현정화, 남자단식 유남규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4년 아테네 대회 때는 유승민이 남자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리우올림픽 남자탁구는 주세혁 정영식 이상수가, 여자 탁구대표팀은 서효원 전지희 양하은이 출전한다. 한국 대표팀은 12년 만의 금빛 랠리를 위해 브라질 현지 훈련장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