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책-‘사랑의 기술’] “사랑하세요, 이웃을 온 세상을…”

입력 2016-08-03 20:18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최근 가진 인터뷰에서 ‘길 위의 책’으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꼽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김보연 인턴기자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과 세 번째 아내 애니스 프리먼의 모습. 글항아리 제공
평생 민중신학의 길을 걸어온 서광선(85) 이화여대 명예교수에게 ‘길 위의 책’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내심 너무 어려운 신학서적을 추천하면 어쩌나 조바심이 났다. 며칠 뒤 날아온 서 교수의 답변. “나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Art of Loving)’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이 책은 독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정신분석학자이자 대중 지식인이던 프롬이 1956년 발표한 책이다. 120여 페이지 짧은 분량에 ‘사랑’이란 주제를 심리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누구나 알기 쉽게 풀어썼다. 그가 세 번째 아내 애니스 프리먼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뒤 겪은 충만한 사랑의 경험이 묻어난다.

서 교수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1960년대 미국 유학 시절이다. 아내와 약혼하면서 아내에게 앞으로 결혼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 책을 함께 읽자고 내밀었단다. “먼저 나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이웃을,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온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아내는 ‘나만 사랑하면 되지, 왜 다른 사람들과 온 세상을 사랑하겠다고 하느냐’고 섭섭해 했다고. 그래서 잠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 교수는 수줍은 청년처럼 빙그레 웃었다.

프롬은 책에서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됐다가 반드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며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사랑은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다’ ‘사랑에 대해 누구나 배워야 한다’는 것이 집필 의도임을 분명히 밝혔다.

서 교수는 “이 책은 말로만 ‘사랑’ ‘사랑’ 외치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 정말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고, 사랑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성경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 이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서 교수는 10대 시절, 목사였던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총살당해 숨진 뒤 복수를 다짐하며 분노와 증오의 시간을 거쳤다. 그 시간을 지나 용서하고, 마침내 자유함을 얻었다는 그의 삶에 이 책은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그는 “나를 사랑할 때 남을 사랑할 수 있고 나아가 온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민중신학과도 통하는 것”이라며 “이 책을 읽다보면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저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말했던 예수님의 사랑이 더 실감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프롬이 그랬듯, 서 교수 역시 갈수록 진정한 사랑이 어려운 시대가 안타깝다. 서 교수는 “요즘 한국 사회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이들이 많다”며 “분노가 쌓이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프롬이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사랑을 붕괴시키는지 분석했던 것처럼, 서 교수는 남들과 항상 비교하며 끝 모를 불안감과 열등감에 시달리는 한국사회가 사랑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연애는 포기해도 사랑은 포기하면 안 된다”며 “그건 인생을,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롬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의 실천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서 교수는 “사랑이란 관심을 갖는 것, 존경하는 것,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끝까지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며 “그 중에서도 상대방에게 ‘끝까지’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그날 오전까지 로런스 프리드먼 하버드대 마음·뇌·행동협회 교수의 신간 ‘에리히 프롬 평전(글항아리)’을 읽다왔다고 했다. 그는 “‘사랑의 사상가’가 사랑으로 산 인생이 어떤 것인지 사려 깊게 보여주는 책”이라며 함께 읽어볼 것을 권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독서 Tip : 스테디셀러인 만큼 한국어 번역본이 다양하게 출판돼 있다. 문예출판사는 2006년 프롬의 마지막 조수를 지낸 라이너 풍크 박사의 후기를 담아 출간 50주년 기념판을 냈다. 서 교수는 쉬운 영어라 원서로 봐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