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봉관 <7> 학업 중단 위기에 어머니까지 병환으로 쓰러져

입력 2016-08-01 20:34
2005년 10월 경북 경주 문화중·고등학교 개교60주년에 참석한 마리엘라 프로보스트 사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이봉관 장로(뒷줄 오른쪽 두 번째). 서희건설 제공

원대한 꿈을 갖고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골에서 경주 시내까지 20리(약 8㎞) 이상 되는 길을 매일 걸어 다니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등하굣길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갈 걱정,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갈 걱정뿐이었다. 걱정 없을 것 같던 학비에도 문제가 생겼다. 3년간 장학금을 보장받고 들어간 학교로부터 등록금을 납부하라는 독촉이 오기 시작했다. 성적이 95점 이상이어야 등록금이 면제되는데 1학년 성적이 95점에 조금 미달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슴에 품었던 꿈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서서히 쪼그라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건강에까지 빨간불이 들어왔다. 당시 통학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천을 떼어다 파는 장사를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시장에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리나케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들으니 자궁근종으로 인해 그동안 하혈을 해 오신 것이었다. 우리 집 형편에 수술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급속히 쇠약해지셨고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생계를 꾸리기도 힘든 상황이 됐다.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농사일을 할까? 어머니를 대신해 장사를 해볼까?’

온갖 생각이 머릴 맴돌았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또 다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다. 당시 경주 문화중·고등학교가 부도가 나 폐교 위기에 처했는데 이 학교를 레이몬드 프로보스트(한국명 부례문) 선교사가 인수했다. 학교에서 신앙심 좋고 공부 잘하는 장학생을 찾는다는 공고가 났다. 나는 목사님, 어머니와 함께 선교사님을 찾아갔다.

학교에 도착하자 선교사님과 마리엘라 프로보스트(한국명 부마리아) 사모님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선교사님은 내 생활기록부와 성적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장학금을 주겠다고 하셨다. 절망 속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여전히 근심이 가득해보였다. 어머니는 무언가 결단한 듯 선교사님께 말했다.

“우리 봉관이에게 장학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간절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병이 심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제 아들을 맡아 키워 주십시오. 이북에서 아이 아버지가 오면 꼭 보답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으면서 자신의 죽음 후 아들의 삶까지 고민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사모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아주머니 병도 고쳐드리고 봉관이 대학도 보내겠습니다.”

그간 창백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낯빛이 그제야 생기를 찾는 것 같았다. 선교사님은 어머니를 바로 병원으로 보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고 치료 절차도 마련해주셨다. 나는 고아들만 20명 정도 양육하는 기숙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고아만 받아들이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한 명을 입사시키고 나는 그 장애인을 돌보는 역할로 동반 입사했다. 장애인 도우미 역할이 생소하긴 했지만 통학과 등록금 걱정을 덜고 어머니가 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된 상황이 내겐 그저 기적 같기만 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지키리라’는 확신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는 순간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