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준동] 대통령의 가족

입력 2016-08-01 18:47

가족 해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어려울 때 의지할 가족도 점점 없어진다는 서글픈 조사도 나왔다. 그래도 마음 한쪽에선 갈망한다. 조건 없이 지켜주고 사랑해주는, 언제 어디서나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가족의 소중함을. 가족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사랑이 싹트는 곳이다. 큰 사람은 작아지고 작은 사람은 커지는 곳이기도 하다. 괴테는 “지도자이든 국민이든 가족에서 평화를 찾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가족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최근 막을 내린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전당대회의 화두는 ‘가족’이다.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나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모두 가족을 총출동시켰다. ‘가족 잔치’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두 후보 공히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트럼프의 가족들은 첫날 부인 멜라니아에서 시작해 막내딸 티파니, 장남 도널드 주니어, 차남 에릭, 마지막 날 장녀 이방카까지 매일 황금시간대에 등장했다. 클린턴 역시 남편 빌, 딸 첼시를 전면에 내세웠다.

공교롭게도 하이라이트인 대선 후보 수락연설 직전 두 후보를 소개한 인물은 다름 아닌 딸이었다. ‘퍼스트 도터’(영애·令愛) 경쟁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연설도 인상적이었다.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는 “내 아버지는 이 나라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조건인 친절함과 열정을 갖고 있고 공정함도 갖고 있다”면서 “아버지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며, 그는 그것을 실천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이 연설은 전당대회 최고의 순간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에 질세라 클린턴의 외동딸 첼시도 미국의 첫 여성 대선 후보가 된 어머니를 위한 찬조연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마음을 전했다. “내가 그녀의 딸인 것이, 그녀가 내 두 아이의 할머니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모녀는 서로의 얼굴을 맞댄 뒤 포옹하는 장면도 연출했다. 클린턴은 수락연설에서 ‘가족’이라는 단어를 두 번째로 많이 언급했다. 이처럼 미국 대선에서 가족은 빼놓을 수 없는 ‘흥행 카드’다. 관행적으로 전당대회에는 후보 가족이 모두 참석한다. 후보 부인은 물론이고 자녀들까지 지지연설에 나선다. 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5명의 아들을 연단에 세웠다.

후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가족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호소력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다. 진심으로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가족을 통해 내면의 인간적인 면도 부각시킨다. 후보 가족은 이런 공개적인 무대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중의 검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가족 얘기를 극도로 꺼리는 한국 정치와 사뭇 다르다.

멀리 볼 것 없이 2012년 8월 전당대회를 통해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박근혜 후보나, 9월 전당대회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후보나, 당시 현장 어디에도 그들 가족은 없었다. 오히려 ‘처음 넘어야 할 산은 가족과 주변’(박 후보) ‘언론 노출 꺼리는 가족들’(문 후보)이라는 우려들이 넘쳐났을 뿐이다.

미국과 달리 국내 대선에서 가족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금기시돼 있다. 선거운동 내내 후보 부인의 보이지 않는 내조는 최고의 덕목이며 당선 후 자녀들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통로가 막힌 이들은 그 주변을 쫓아다니는 ‘부나방’들과 공생하며 검은 권력을 휘두르는 사례를 많이 봐왔다. 우리 정치사에서 대통령 ‘가족 잔혹사’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이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때다. 시장의 공개적인 평가를 거친다면 ‘대통령의 가족’이라고 해서 역차별을 받을 이유가 없다. 검증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김준동 사회2부장 jd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