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그때 그 모습은 꽤 감동적이었다.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일. 워낙 치열하고 네거티브가 심해 이명박, 박근혜 후보 중 누가 져도 결과에 승복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석패한 박 후보의 입을 많은 이들이 숨죽여 지켜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깔끔했다.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 정권교체를 위해 백의종군하겠다.” 그러나 이듬해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가 대거 낙천되자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분노했다. 책임소재를 떠나 이명박정권 내내 양측은 으르렁거렸고 승복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친박과 친이, 친박과 비박 간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의 기저에는 한나라당과 보수 일각의 ‘불복 심리’가 깔려 있었다. 이길 줄 알았는데 지자 강경 보수 진영에선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기류가 팽배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안철수의 야권 후보 단일화 앙금은 지금도 남아 있다. 문 후보 측은 안 후보가 적극 지지하지 않았다는 배신감을 갖고 있고, 안 후보 측은 문 후보가 예우해 주지 않았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며칠 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패한 버니 샌더스가 흔쾌히 승복해 감동을 줬다. 그는 “경선을 했고, 결과가 나왔다. 그게 민주주의”라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지자들을 다독였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 민주당은 친 클린턴계와 친 샌더스계로 나눠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미 정치권에서 경선에 불복했다거나, 뒤에서 다른 소리를 했다는 얘긴 잘 들어보지 못했다.
내년 이맘때면 우리나라에서도 여야 대선 후보가 선출된다. 겉으로 승복해 놓고 행동은 다르게 하거나, 불복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하게 지는 게 멀리 보면 이기는 길일 수 있다. 한국 정치에도 멋진 승복 문화가 정착되길 기대해 본다.
한민수 논설위원
[한마당-한민수] 승복 문화
입력 2016-08-01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