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범죄는 국경을 넘나들고 있지만 검찰 수사는 국경의 벽 앞에 멈추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외국 법인이나 외국에 체류 중인 피의자에 대한 직접 조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외국 사법기관과의 협조 절차가 늘어나고 있지만 강제력도 없고 시간이 오래 걸려 수사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31일 사법 당국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이 수사 중인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롯데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 ‘폭스바겐 연비·배출가스 조작 의혹 사건’ 등 주요 사건이 모두 외국인(법인) 조사 부분에서 차질을 빚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특별수사팀은 최근 거라브 제인(47) 전 대표를 비롯해 옥시 전·현직 임직원 5명에 대한 서면조사에서 “잘 모른다” “기억에 없다”는 등의 무성의한 답변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외국에 머물면서 검찰의 소환조사를 거부하고 있다. 특히 옥시의 마케팅을 담당했던 한 임원은 ‘아이에게도 안심’이라는 문구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한국어를 못해서 문구를 점검할 수 없었다”는 황당한 답변을 했다. 수사팀은 이들에게 2차 질의를 보낼 예정이지만 뚜렷한 소득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롯데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한 롯데케미칼 수사도 일본 쪽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반쪽 수사가 될 위기에 처했다. 검찰은 롯데케미칼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사기를 벌여 약 200억원을 돌려받은 혐의를 잡고 기준(70) 전 롯데물산 사장을 구속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롯데케미칼의 해외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원료를 수입하면서 일본 롯데물산에 수백억원의 수수료를 지급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일본 롯데물산에 관련 회계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일본 롯데물산은 ‘일본 임원들이 반대한다’며 버티는 중이다. 검찰은 일본 롯데물산의 자료 제출 거부가 신동빈 회장의 묵인 아래 이뤄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신 회장은 일본 롯데물산의 지주회사인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이다. 검찰은 일본 사법 당국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실제 자료 제출까지는 수개월이 걸릴 전망이다.
폭스바겐 연비·배출가스 조작사건의 수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는 트레버 힐 전 사장 등 폭스바겐 본사 임직원 7명의 출석요청서를 독일 본사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에 입국해 조사받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법무부에 따르면 국내 수사기관이 외국 사법기관에 수사 협조를 요청한 형사사법공조 건수는 2013년 109건에서 2014년 183건, 2015년 236건으로 3년 동안 배 이상 늘었다. 외국 또는 다국적 기업의 국내 진출 확대와 마약·테러 등 글로벌 범죄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국이 공조를 거절해도 이를 강제할 방안이 없다. 협조 절차만 해도 국내에서 검찰-법무부-외교부 등을 거쳐야 하고 상대국에서도 비슷한 절차가 진행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검찰 관계자는 “기업 수사는 경제적인 영향 등을 고려해 수사를 오래 끌 수 없다는 부담이 있다”면서 “검찰로서도 혐의 입증 및 자료 확보가 어려운 해외 수사에 ‘공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용택 기자 nyt@kmib.co.kr
[기획] 국경없는 범죄 느는데… 수사 고비마다 ‘국경의 벽’
입력 2016-08-01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