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정혼란만 키우고 무용지물 된 자본확충펀드

입력 2016-07-31 17:41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 올 상반기 온갖 논란이 불거졌던 자본확충펀드가 설립 한 달 만에 무용지물이 되는 모양새다. 자본확충펀드는 조선업 등 구조조정 업종에 대한 부실대출로 자기자본비율이 떨어진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 지원을 위해 11조원 규모로 조성됐다. 이 중 한국은행이 10조원을 부담하기로 했는데, 사실상 조선업 등 특정 업종의 구조조정을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지원하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거셌다. 국책은행에 대한 직접 출자를 요구하는 정부와 중앙은행 독립성 훼손을 우려하는 한국은행 사이에 지루한 싸움이 석 달 가까이 이어졌다.

이 펀드가 이처럼 쓰임이 없게 된 것은 정부가 당초 입장을 바꿔 수은과 산은에 대한 1조4000억원의 현금 출자 예산을 추가경정예산(추경)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발적 입장 변경은 아니고 여소야대의 힘에 의해서다. 야3당이 “국회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중앙은행 발권력을 활용하는 자본확충펀드 이용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김성식 국민의당 정책위의장은 “한은의 팔을 비틀 게 아니라 재정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결정이다. 국책은행에 대한 자금 지원은 원칙적으로 재정에서 해야 하고 국회 심의를 받아야 한다.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고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려다 보니 정책 당국자들이 국책은행 부실 확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편법을 쓴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용어까지 만들며 혼선을 키운 일부 전직 관료들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은이 산은의 산업금융채권 등을 매입해 구조조정 업종을 지원하는 정도를 ‘한국판 양적완화’로 이름 붙인 것은 ‘의미 왜곡’ 정도가 아니라 ‘여론 조작’의 냄새까지 풍긴다.

이번 자본확충펀드를 둘러싼 논란은 재정과 금융에 막강한 권한을 휘둘러온 경제관료들의 법·원칙 경시풍조와 행정편의주의적 사고가 얼마나 심각한지 여실히 보여줬다. 국회는 추경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자본확충펀드를 둘러싼 국정 혼선의 원인과 책임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