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法’ ‘느린 法’… 기업 앞에 小비자

입력 2016-07-29 17:30 수정 2016-07-29 20:59

한국에서는 집단소송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집단소송은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소비자들이 일일이 모여서 기업 상대로 단체로 소송을 낼 수는 있지만 이는 공동소송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다. 공동소송은 소송을 낸 원고들에게만 판결의 효력이 적용되기 때문에 집단소송과 개념이 다르다. 카드사 정보유출 사건 소송이 공동소송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서울중앙지법에서만 약 20만명이 소송 100건을 진행하고 있다.

똑같은 피해 사건에 당사자들이 일일이 소송을 내는 불편을 막기 위해 피해자의 대표가 소송을 내는 선정당사자 제도가 있다. 하지만 특정 피해자 중 대표를 뽑는다는 점에서 잠재적 피해자 모두에게 효력이 적용되는 집단소송과는 차이가 있다. 현대차에 통상임금 소송을 낸 근로자들이 선정당사자 형식으로 소송을 진행했다.

제품 결함이나 담합 등으로 피해를 본 소비자들을 대표해 소비자단체가 소송을 내는 소비자단체소송제도도 있다. 하지만 판매금지 등만 요구할 수 있을 뿐 손해배상 청구는 불가능하다. 2008년 제도가 도입됐지만 옛 하나로텔레콤 개인정보 침해행위 금지 소송 등 단 3건만 제기돼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다.

그렇다고 한국에 집단소송제도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증권 부문에서는 집단소송이 가능하다.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에서는 사업보고서 허위기재, 미공개정보를 이용한 시세조종행위, 감사인의 부실감사 및 분식회계 등으로 피해를 입은 소액주주들이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11년 만에 첫 증권 집단소송 재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증권 관련 집단소송 역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도입됐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에 돈을 빌려주면서 증권 분야 집단소송 도입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한국 경제위기의 원인이 기업지배구조의 후진성과 기업경영의 불투명성에 있다는 진단이었다. 이후 수차례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재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됐고, 2005년 1월에서야 시행됐다. 그사이 1998년 대우그룹, 2003년 SK글로벌 등 대형 분식회계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어렵게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가 도입됐지만 아직 제구실을 못 하고 있다는 평가다. 11년 동안 겨우 9건만 제기됐다. 본안소송(정식) 재판은 그동안 한 건도 열리지 않았다가 지난 6월 개인투자자들이 로열뱅크오브캐나다를 상대로 낸 소송의 첫 재판이 열렸다. 집단소송 특성상 법원이 피해자의 다수성·공통성을 따져 소송허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 절차도 3심제를 거쳐야 해 긴 시간이 소요된다. 소비자의 빠른 권리구제라는 집단소송의 도입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더 번거롭다. 법무법인 한누리 김주영 변호사는 “집단소송이 사실상 6심제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온다”며 “재판 허가 결정에 대해서는 피고 측의 항고권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대표당사자소송(class action)이라는 집단소송제도가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소비자 피해, 환경 분야 등 일반적인 부문에서 광범위한 집단소송이 가능하다. 증권 집단소송의 경우 1996년 제도 도입 후 지난해 10월까지 모두 4034건이 제기됐다. 엔론 분식회계 당시 투자자들이 집단소송을 통해 72억2700만 달러(약 8조2000억원)를 배상받았다. 현대기아차는 미국에서 연비 과장 사실이 드러난 후 집단소송이 제기되자 2013년 소비자들에게 3억9500만 달러(약 4200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에서는 별도 배상이 없었고, 국내 소비자들이 개별적으로 현대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기업으로서는 전체 피해자들이 당사자가 되는 미국식 집단소송보다 한국의 공동소송은 부담이 훨씬 적다.

징벌적 배상도 제한적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역시 해외 선진국들에 비해 뒤처져 있다. 하도급 거래(2011년)와 개인 신용정보 유출 부문(2015년)에서만 제한적으로 도입됐다. 원청 업체가 하도급 업체 기술을 빼앗거나 부당하게 발주 취소 등을 한 경우, 개인정보처리자의 고의 또는 중대 과실로 개인정보의 분실·도난·유출 등이 발생한 경우 적용된다. 하지만 손해액의 최고 3배만 배상받을 수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해외에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 1763년 영국에서 6시간 동안 용의자를 불법 감금한 집행관에게 용의자의 신체 피해액인 20파운드와 함께 1280파운드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린 게 첫 사례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발생한 1994년 맥도날드 커피 소송은 잘 알려진 사례다. 커피를 쏟아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치료비 16만 달러(약 1억8000만원) 외에 286만 달러(약 32억2220만원)를 징벌적 배상으로 받았다. 맥도날드는 소송 후 일회용 컵에 ‘커피가 뜨거우니 주의하라’는 주의문구를 새겼다. 미국 거주 흡연자인 리처드 뷔켄은 56세 때 폐암에 걸려 필립모리스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는데 2006년 연방대법원은 550만 달러(약 61억원) 보상적 배상, 5000만 달러(563억원) 징벌적 배상을 확정 판결했다. 옥시가 한국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 10억원을 제시한 것에 비하면 거액이다. 러시아는 2008년 2배수 징벌적 배상 개념을 민법에 도입했다. 중국은 기업에 무한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침권책임법을 2010년 시행하고 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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