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우리 민법의 실손해 배상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남용에 따른 기업활동 위축 우려도 있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사안입니다.”(황교안 국무총리)
“총리,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과거의 법전을, 과거의 경제학 교과서를 벗어던지십시오.”(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
지난 4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이 같은 내용의 대정부 질문이 오갔다. 가습기 살균제 등으로 집단소송,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목소리가 높지만 정부와 여당 일각에서는 도입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며 사실상 반대하고 있다.
2005년 증권 분야에서 집단소송이 도입됐지만 제조업 등으로 확대되는 방안은 진척이 없다. 소관부서인 법무부는 10년이 넘도록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노무현정부는 2004년 기업 부담을 이유로 분식회계 집단소송 시행을 2년 유예하기도 했다.
2005년 4월 김승규 당시 법무부 장관은 “기업이 잘해서 돈도 벌고 해서 국민들이 잘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가 법무부가 기업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법무부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영미법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제도라 대륙법계 우리와 체계가 맞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대륙법계인 중국·대만에서는 제도를 도입했다.
집단소송=프랑켄슈타인?
특히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의 반대가 거세다. 전경련은 미국처럼 집단소송이 도입되면 소송이 남발돼 경제가 위축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미국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2005년 집단소송제도를 두고서 “미국 기업들이 쓰레기 같은 소송에 대응하느라 매년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저명한 법학자인 리처드 포스너 미 연방법원 판사는 “집단소송은 기업에 대한 합법적 공갈 수단”이라며 폐지론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버드대 아서 밀러 교수는 “(집단소송이) 사회악의 만병통치약인가, 아니면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집단소송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쪽에서는 현재의 공동소송, 대표자소송을 통해서도 집단소송과 같은 효과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피해자의 소송 참여가 쉬워졌기 때문에 소비자 권리 구제도 쉬워졌다는 것이다.
집단소송이 소비자 구제보다는 변호사들 배만 불린다는 지적도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2009년 국회에서 “미국 로펌 밀버그 웨이스는 1995년 집단소송의 50%를 독식하며 1억 달러를 벌어들였다”며 “집단소송이 도입되면 보수를 기대하는 변호사들이 끊임없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손해배상액의 예측이 불가능하고, 민사소송으로 사실상의 형사적 제재를 가하는 셈이라 이중처벌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징벌적 손해배상보다는 현행 손해배상제도를 개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도입을 찬성하는 법조인들은 기업 불법행위를 사전 예방할 수 있는 등 순기능이 더 많다고 본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지지하는 변호사·교수모임(징손모) 상임대표를 맡은 김현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기업은 비용이 더 크면 위반행위를 자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징손모에는 1000여명의 현직 변호사와 교수들이 참여하고 있다. 중앙대 함영주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소송 남용 우려에 대해 “변호사가 집단소송을 하다 비용 문제 때문에 망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어 남소를 할 실익도 없다”며 “우리 소송제도는 증권집단소송, 소비자단체소송 등 반찬 가짓수는 많은데 정작 먹을 만한 것은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법원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에 긍정적이다. 고영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지난달 국회에서 “(법원은)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에 상당히 오픈마인드를 갖고 있다. 나름대로 연구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은 지난달 국회입법조사처와 ‘국민의 생명·신체 보호 적정화를 위한 민사적 해결방안의 개선’ 심포지엄을 열었다.
지난 15일 열린 전국 민사법관 포럼에서는 고의나 중과실로 인해 제기된 손해배상 소송에서 위자료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불법행위 시 위자료 기준을 1인당 2억∼3억원으로 늘리고, 피해자가 아동인 경우 등엔 배상액을 1.5∼2.5배 가중하는 한편, 재판부가 추가로 50% 범위 내에서 증감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현재 손해배상 위자료는 교통사고 사망 시 1억원이 기준이어서 낮은 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법 테두리 내에서 최대한 피해자의 권리를 구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사법부의 고민이 담겨 있다.
공은 국회로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과 맞물려 정치권에서도 집단소송 도입 등에 긍정적인 여론이 커지고 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지난달 제20대 국회의원 12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121명(96%)이 소비자 집단소송제에 찬성했다. 19대 국회에서 소비자 집단소송법,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징벌적 손해배상법)이 임기만료로 폐기됐지만 20대 국회에서도 다시 관련 법안들이 제출됐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지난 26일 집단소송법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집단소송을 특정 분야로 한정하지 않고 전면 도입하는 내용이다. 미국식 집단소송제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피고가 원고의 주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입증하도록 규정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피고가 충분한 답변을 하지 않아 법원이 추가 설명(석명)을 요구했는데 이에 불응하는 경우 원고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도록 했다.
박 의원은 앞서 지난달 징벌적 배상법 제정안도 대표 발의했다. 가해자가 타인의 권리나 이익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과 발생을 용인할 경우 손해배상액의 3배까지 보상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박 의원은 “제2의 옥시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20대 국회에서 반드시 제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국회에 제정안이 제출되면서 법안을 둘러싼 논의도 불붙을 전망이다. 보수성향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는 지난 27일 논평을 내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는 법안들이 20대 국회에서 쏟아지고 있다.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진입한 상황에서 사회적 비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현 전 회장은 반면 “집단소송법이 통과되면 소비자 보호에 새로운 획을 긋는 일”이라며 “다국적 기업의 횡포로부터 우리 국민을 보호할 수 있고, 옥시나 폭스바겐 같은 사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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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7-29 17:30 수정 2016-07-29 2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