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대결한 지난 8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 한화가 2-1로 겨우 앞선 4회말 1사 때 민머리에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흑인이 관중석에서 수첩을 들고 벽에 몸을 기댔다. 한화의 외국인 타자 윌린 로사리오(27·도미니카공화국)와 닮아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야구장 분위기를 만끽하는 보통의 외국인 관중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로사리오가 타석을 밟은 순간부터 관전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함성소리와 응원동작에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겨 매서운 눈으로 로사리오를 응시했다. 그리고 투수의 공이 타석으로 도달할 때마다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초구에 방망이를 내밀었는지, 어떤 구위에 볼을 골랐는지, 안타를 쳤는지 아웃을 당했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로사리오는 삼성 선발투수 김기태(29)의 3구째를 타격했다. 공은 120m를 날아 우중간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로사리오의 솔로홈런. 앞서 2회말 투런포를 날렸던 로사리오의 연타석 홈런이자 올 시즌 22번째로 그린 아치였다. 로사리오는 한화 팬들의 뜨거운 함성과 응원 속에서 1, 2루를 밟고 3루를 돌면서 테이블석 관중석을 향해 경례했다. 경례한 방향엔 조금 전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던 닮은꼴 외국인이 있었다. 이 외국인은 로사리오를 뿌듯한 표정으로 보면서 오른손 거수로 경례를 받았다. 그는 바로 로사리오의 이복형 모제스 파비안(35)이었다.
펄펄 나는 로사리오의 뒤엔 언제나 파비안이 있다. 파비안은 로사리오의 타석 때마다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관중석에서 관찰하고 수첩에 적어 기록으로 남긴다. 경기를 마치고 돌아간 집에서 수첩을 펼치고 로사리오와 마주앉아 그날의 활약상을 분석하고 토론한다. 로사리오의 전담 전력분석관을 자처한 셈이다.
‘슬라이더가 몸쪽 깊숙이 들어왔을 때 방망이를 내밀려고 했던 건 좋지 않았어. 헛스윙이 될 뻔했잖아.’ ‘이 타구는 정말 잘 노렸어. 오늘 연타석 홈런은 장말 짜릿했다고. 관중석에서 온통 네 이야기뿐이었어.’ 이런 식의 대화가 두 형제 사이에 오간다. 오직 가족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함으로 전력분석관의 냉정함을 감싼 파비안의 분석과 조언은 로사리오가 승승장구하는 원동력이다. 어머니만 같고 아버지가 다른 이복형제지만 어느 피붙이보다 끈끈하게 서로를 지탱한다.
파비앙은 로사리오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활약했던 2011년부터 경기장으로 동행했다. 지금처럼 관중석에서 로사리오의 기록을 수첩에 적어 분석했다. 때때로 라디오나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로사리오를 포함한 콜로라도 선수들의 활약상을 분석하고 해설하는 애널리스트로 활동했다. 비록 공인을 받진 않았지만 재야의 전력분석관으로 6년째 활동 중인 셈이다.
로사리오는 파비앙의 분석을 경청하고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워나간다. 그렇게 한화의 새로운 ‘다이너마이트타선’에서 클러치히터로 자리를 잡았다. 로사리오는 28일 SK 와이번스를 12대 8로 격파한 홈경기에서 2회말 2사 1, 2루 때 쓰리런홈런을 터뜨렸다. 이틀 연속 홈런포를 가동했다. 파비앙은 지난 25일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일시 귀국한 탓에 이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체류 중인 나머지 가족들이 로사리오의 경례 세리머니를 대신 받았다.
이 홈런은 로사리오의 84번째 타점이었다. 로사리오는 타점 단독선두를 달리고 있다. 로사리오는 한화가 1992년 장종훈(119타점) 이후 24년 동안 배출하지 못했던 타점왕에 도전하고 있다. NC 다이노스 강타자 에릭 테임스와 타격 주요부문에서 경쟁할 수 있는 선수는 사실상 로사리오가 유일하다. 테임스는 80타점으로 이 부문 2위다. 홈런에서는 테임스가 30개로 압도적 1위다. 로사리오(24개)는 공동 2위에서 테임스를 추격하고 있다.
한화 구단 관계자는 “로사리오가 파비앙에게 많이 의지한다고 들었다. 파비앙은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도미니카 음식도 요리해준다”고 전했다.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펄펄 나는 로사리오 뒤엔 형이 있었다
입력 2016-07-29 00:11 수정 2016-07-29 0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