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승욱] ‘완벽한’ 힐러리, 밉상인 까닭은

입력 2016-07-27 18:13

‘꼬마 니콜라’라는 책이 있다. 프랑스 초등학생 이야기다. 삽화가 좋아 대학 입시를 앞두고 기분전환하려고 읽은 기억이 난다. 책에는 주인공 니콜라만큼 귀여운 아냥이 나온다. 수학을 무척 잘해 늘 칭찬을 받는 모범생이다. 부잣집 도련님이어서 나비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학교에 온다. 친구들의 장난을 선생님에게 고자질하지만 안경 때문에 때리지 못하는 얄미운 캐릭터다.

요즘 CNN에서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보면 꼭 아냥이 생각난다. 클린턴은 1947년생이다. 그런데 미모는 여전하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연설은 야무지다. 경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고교 우등생으로 명문여대에 진학했다. 대학생으로 민권운동에 참여했다. 좋아하는 스포츠는 테니스, 발레, 수영이다. 졸업식에서 학생대표로 연설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예일대 로스쿨에서 훗날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을 만나 28세에 결혼했다. 결혼 3년 만에 주지사 부인이 됐다. 정치인 남편을 착실히 내조하면서 변호사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뉴욕주 상원의원을 거쳐 국무장관으로 일하며 퍼스트레이디 출신이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자식농사도 성공해 딸은 예일대에 갔다. 나랏돈으로 움직이는 전용기를 10년 이상 이용한 권력자이자 틈틈이 모은 재산이 1000억원을 넘는 재력가다.’

18홀에서 홀인원 11개를 포함해 38언더파를 쳤다는 식의 개인숭배가 아니다. 클린턴의 실제 삶이다. 하나만 이뤄도 성공한 인생인데 참 많은 일을 했다. 심지어 빌 클린턴이 르윈스키 스캔들에 시달릴 때는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빌을 사랑한다.” 화내는 모습을 노출하지 않았다. 가식적 정치인이라는 손가락질은 미소로 버텼다. 재클린 케네디마저 오나시스로 이름을 바꿨는데 69세 클린턴은 남편과 함께 손주를 품에 안은 사진을 공개했다.

‘완벽한 클린턴’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1993년에 뉴욕타임스매거진은 세인트 힐러리(Saint Hilary)라고 썼다. 이런 식의 표현은 ‘잘난 힐러리’ ‘(너무 잘나서) 미운 힐러리’를 거쳐 ‘혐오스러운 힐러리’로 진화했다.

많은 미국인이 “클린턴은 집에서 아이를 보고 식사를 준비하는 평범한 주부는 안중에 없다”고 생각한다. 양성평등과 여성의 사회활동을 수없이 강조했지만 바버라 부시가 누렸던 미국인의 어머니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올해 선거의 양상도 상대가 ‘여성비하계의 권위자’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었다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 클린턴은 밉상이다. 여론조사 용어로 ‘비호감도가 높다’고 표현한다. 평범한 미국 시민은 클린턴이 막강한 권력을 남용했다고 여긴다. 국무장관 때 개인 이메일을 쓴 게 중요하지 않다. 다른 장관은 감히 못하는 규정위반을 아무렇지 않게 해버리는 오만함이 짜증난다. 불기소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남편이 현직 법무장관을 전용 제트기에서 만난 게 불쾌하다. 당 지도부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 건 인정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제가 잘난 듯 뻐기는 모습은 용서할 수 없다.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덕목은 수시로 달라진다. 클린턴의 성실함과 업무처리 능력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그건 ‘장관의 덕목’이다. 대통령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르다. 클린턴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건 과거와 현재에 근거해 미래를 조망하는 비전이다. 내년이면 우리도 같은 고민을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흐르는 시대정신(Zeitgeist)은 무엇일까. 누가 그것을 읽어 비전으로 내놓을까.

고승욱 국제부장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