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에서 30리(약 12㎞) 길을 걸어 내려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내남면에 해당하는 소재지였다. 전쟁 피란처로 택해 들어간 곳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당장 끼니를 챙기는 것도 막막했다. 태어나서 먹고 잘 것을 걱정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어떤 연유였는지도 모르게 문득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 살이던 꼬마 아이는 학교로 향해야 할 발걸음을 논밭으로 옮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내가 이 집안의 가장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의 집 논과 밭을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았다. 동네 머슴들과 함께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짚으로 새끼를 꼬아 생계를 이어갔다. 어느 이른 봄날 논 주인에게 일거리를 받아 모를 심으러 논에 들어갔다. 초봄의 논물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를 악물고 꾹 참으려는 순간 시커먼 거머리들이 피를 빨아먹겠다고 내 종아리로 달려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리를 “꽥” 지르고는 논 밖으로 뛰쳐나왔다.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네가 세상 모르고 게을러 터졌으니까 그렇게 밖에 못 사는 거야. 당장 논에 들어가 일을 하든지 집으로 가든지 해!”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어린 아이에게 저런 모진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면 우리 네 식구는 끼니를 걸러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열심히 일해서 이 동네의 논을 모두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고 일을 시키는 모습을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도를 하고 다시 논에 들어가니 신기하게도 서럽고 분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렇게 차갑던 논물도 한여름 신나게 발 담그던 계곡물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또래 동무들보다 몸이 약했던 나는 그야말로 집념으로 농사일에 임했다. 그렇지만 부족함 없이 챙김만 받던 일곱 살 소년에게 농촌의 들녘은 목숨을 건 전쟁터와 같았다. 하루 종일 허리를 숙인 채 모를 찌고(모내기철에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 묶는 것) 또 심고 나면 저녁 무렵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모가 자라 김을 매는 것은 더 힘든 작업이었다. 잡풀을 제거하기 위해 벼 사이로 몸을 숙여 들어가면 무성하게 자란 벼에 눈가가 찢기고 피가 새어나왔다. 삼복더위라 얼굴에 땀이 쏟아지면 상처에 땀이 들어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눈이 따가워 손으로 닦기라도 하면 손에 묻은 진흙까지 눈에 들어가 안구가 땀과 진흙으로 뒤범벅 됐다.
잡초를 뽑기 위해 진흙땅을 뒤집을 때면 흙 속에서 나오는 거름냄새가 코를 찌르고 지열이 숨을 막히게 했다. 입고 있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가끔 쇠파리가 젖은 옷 속으로 살을 찌르기라도 하면 물린 자국이 주먹만큼 부어올라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견뎌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우리 가정의 가장입니다. 저에게 힘과 지혜를 주세요. 이 가정이 축복의 가정이 될 수 있도록 저의 무릎과 허리를 세워주세요.”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봉관 <3> “내가 집안의 가장”… 일곱 살부터 농사일 시작
입력 2016-07-26 2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