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 양녕대군 후손으로 태어나 부유한 삶을 보장받은 소위 ‘금수저’ 해방둥이였다.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던 증조할머니는 ‘유학’이란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에 자손들을 만주로 보내 공부를 시키기도 하셨다. 내가 태어난 당시에는 백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정이 얼마 되지 않았다. 찍더라도 옷을 벗고 있는 아기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시절에 요즘으로 치면 1000만원이 나가는 명품 옷을 입고 백일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풍족한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이 일본의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후 북한이 공산주의 사회가 되자 기독교 가정이었던 우리 가족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공산주의의 핍박을 받던 미국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은신처로 집을 내줄 만큼 신앙심이 두터웠던 아버지의 결단이었다.
부모님과 누나 둘, 나까지 우리 다섯 식구는 콩나물시루 같은 기차를 타고 며칠을 이동해 서울에 도착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데다 생후 6개월 된 아기였던 나는 고된 여정 때문에 팔딱팔딱 뛰던 숨골이 멈추고 말았다. 깜짝 놀란 아버지가 사방으로 의사를 찾아 숨골에 100여개의 뜸을 뜨고 나서야 간신이 숨이 돌아왔다.
한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문제가 터졌다. 신의주를 출발해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던 할머니가 오시지 않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서울행 기차를 타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는 다시 결단했다. 외가인 경북 영천에 어머니와 삼남매를 맡겨두고 할머니를 모시러 신의주로 떠난 것이다. 3개월 안에 할머니와 함께 오시겠다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외가댁은 100호 가량이 같은 성씨인 집성촌에 있었다. 이씨라곤 우리 삼남매뿐이었다. 하지만 외가 더부살이도 나쁘진 않았다. 외할아버지와 형제들은 나와 누나들을 친손자처럼 아껴주셨다. 빼어난 미모에 넉살도 좋았던 어머니는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면서 영천 지역의 주민들도 피란길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을 아껴주셨던 외할아버지들도 전쟁이 터지고 피란을 가게 되자 아들 내외와 그 자식들을 먼저 챙겼다. 우리 가족은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 버렸다. 어머니가 받은 충격과 상처도 컸다. 결국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는 외가댁 식구들과 따로 경주행 피란길에 올랐다. 다른 지역에는 연고도 없었거니와 마침 어머니의 사촌동생이 경주에 산다는 소식에 한 줄기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경주 시내의 한 식당에서 일을 하며 우리 삼남매를 키웠다. 경주에 산다는 어머니의 사촌동생도 큰 힘이 돼 주진 못했다. 전쟁의 공포도 여전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살리는 게 가장 큰 목표였던 어머니는 전쟁의 위험을 피해 경주 외곽의 깊은 산골로 또 한 번 피란을 감행했다. 고작 일곱 살의 나이.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에서 또 한 번의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봉관 <2> 공산주의 피해 월남하다 아버지와 영영 헤어져
입력 2016-07-25 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