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수선(黑水仙)’이라고 하면 아마 배창호 감독의 2001년작 액션영화를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고전 외국영화 제목을 멋대로 훔쳐다 쓰는 몰지각한 한국 영화업자들 탓일 뿐 ‘흑수선’은 1947년에 나온 영국 고전영화다. 원제 Black Narcissus.
걸작 발레영화 ‘분홍신(1948)’ 등으로 1940∼50년대 명성을 날린 마이클 파월-에머릭 프레스버거 콤비(제작·각본·연출)의 이 영화는 무엇보다 명촬영감독 잭 카디프가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던 테크니칼러로 찍은, 숨이 멎을 만큼 화려하고 선명한 화면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유명한 것도 있다. 각각 수녀와 인도 원주민 처녀로 나오는 데보라 커와 진 시몬스 두 영국 여배우의 아름다움이다. 수녀 역을 맡아 거의 ‘쌩얼’을 보여주는 청순하고 기품 있는 데보라 커의 미모와 얼굴을 검게 칠하고 인도식 코걸이를 한 채 숲속 요정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신인 시절 진 시몬스의 자태는 화면을 수놓은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이 영화가 이름 높은 고전으로 대접받는 것은 영화사(史) 초기의 걸작 ‘에로영화’라는 점이다. 에로영화라니까 여성의 적나라하게 벗은 모습과 섹스 장면이 난무하는 요즘 에로영화를 연상할지 모르지만 그런 영화와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말초적 성적 흥분 따위와 전혀 무관하다.
영화는 수녀들의 세속적 욕념과 남자를 둘러싼 거의 무의식적인 갈등과 질투를 다루고 있다. 그 모든 게 암시와 은유를 통해 묘사된다. 드러나지 않게 “모든 프레임과 이미지에 에로티시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흑수선’을 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런 에로티시즘도 있을 수 있구나, 옛날 영화에서도 에로티시즘을 찾을 수 있구나 하는.
사실 진정한 에로티시즘은 너무 노골적으로 까발린 데서는 찾을 수 없는 법. 무조건 벗기고 무조건 섹스에 매몰된 요즘 에로영화에 질린 이들이라면 은근히 마음을 끌어당기는 옛날 에로영화들을 찾아보는 건 어떨지.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영화이야기] <80> 옛날 에로영화는
입력 2016-07-25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