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프랑스 볼로뉴 숲 속의 공원은 피로 물들었다. 귀족들이 수시로 검을 들고 결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화약이 등장했지만 명예와 신분의 상징인 검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공장소에서 검을 지니고 다닐 수 있었던 귀족들은 결투로 분쟁을 해결했다. 중세시대 프랑스는 펜싱의 중심 국가였고, 귀족들은 결투에 열광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칙령으로 결투를 금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펜싱은 궁정 행사로 다시 태어났다. 그제서야 귀족들은 펜싱을 스포츠로 즐기기 시작했다.
펜싱은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플뢰레(Fleuret)는 첫 대회부터 올림픽 무대에 올랐고, 에페(Epee)와 사브르(Sabre)도 곧 추가됐다. 1913년 국제펜싱연맹(FIE)이 설립되며 펜싱 규칙이 정착됐다.
펜싱은 올림픽 초기 다른 종목과 달리 아마추어 부문과 명인 부문으로 나뉘어 있었다. 또 두 그룹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도 있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이탈리아 리브르노 출신의 나디 형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은 형제는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형 네도는 1912 스톡홀름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땄고, 1920 앤트워프올림픽에선 5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의 다관왕 기록은 1972 뮌헨올림픽에서 미국 수영선수 마크 스피츠(7개)에 의해 깨졌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펜싱은 전성기를 맞았다. 파시즘을 숭배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상류층은 중세시대의 향수와 전사의 투혼을 대변하는 펜싱에 빠져들었다.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 장군은 자주 펜싱시합을 벌였다. 나치 SS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의 부사령관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벨기에에서 노획한 FIE 자료를 베를린의 자기 사무실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펜싱을 세계적인 스포츠로 운영할 계획이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도 저널리스트로 활약할 당시 결투에 관심이 많았고, 권력을 쥐었을 때 펜싱 경기를 외국 기자들에게 보여 주기를 좋아했다. 이탈리아 펜싱 대표팀은 무솔리니의 대대적인 후원을 받아 세계 최강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프랑스 펜싱은 점차 쇠퇴했다. 펜싱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1956년에 일어나 헝가리 혁명이었다. 이 여파로 세계 최고 수준의 헝가리 펜싱 선수들이 스웨덴과 폴란드 루마니아 소련 등으로 탈출했다. 특히 소련에 정착한 헝가리 선수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펜싱 일가를 세웠고,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를 최강으로 이끌었다.
한국 펜싱은 2000년대 이후 올림픽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김영호가 2000 시드니올림픽에서 플뢰레 금메달을 따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선 남현희가 여자 플뢰레 개인전 은메달을 따내 한국 펜싱의 저력을 보여 줬다. 이어 2012 런던올림픽에선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 등 총 6개의 메달을 수확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국 펜싱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남녀 총 17명의 선수를 출전시킨다. 남자 사브르 개인전의 구본길과 여자 플뢰레 개인전의 남현희 등이 메달 유망주로 꼽힌다. 이번 올림픽 펜싱엔 총 10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경기는 8월 6∼14일(현지시간) 카리오카 아레나 경기장에서 열린다.김태현 기자
[아는 만큼 보인다 <3> 펜싱] 목숨 건 칼싸움, 스포츠로 변신
입력 2016-07-24 1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