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바나나 교실

입력 2016-07-24 18:31

아홉 살 아이에겐 무척이나 버거웠다. 뜻 모를 단어로 채워진 문장을 줄줄 외는 건 고역이었다. 아마 반쯤 외우다 포기했던 것 같다. ‘국민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어머니에게 이건 심각한 신호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벌써 ‘시험의 관문’에서 좌절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날 저녁, ‘강행군’이 시작됐고 자정 가까이 돼서야 ‘합격’을 받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받은 상장은 덤이다. 그래서인지 4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민족중흥의’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 몇 문장쯤은 외운다.

열 살 아이에겐 그저 숨기고 싶은 일이다. 다들 한글과 영어 사교육을 듬뿍 받았는데 아이는 한글조차 서툰 상태에서 입학했다. 과학을 좋아하고, 상상하는 걸 즐기지만 그런 건 학교 성적에 도움이 안 됐다. 뭘 해도 늘 뒤처졌다. 아이가 학교생활을 자꾸 숨기고 감추자 부모는 두렵다. 여름방학을 맞아서 수학, 영어로 이어지는 ‘선행학습 대열’에 뛰어들어야 하나 갈등한다.

공교육 붕괴는 새삼스럽지 않다. 어느 중학교 1학년의 첫 수학 수업시간이었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중학교 1학년 과정을 배운 사람 손들어 봐.” 99%에 가까운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2학년, 3학년 과정으로 질문이 이어졌다. 절반, 그리고 그 절반의 절반이 잇따라 손을 들었다고 한다.

한 번의 평가(시험)가 미래를 결정짓는데 ‘정상을 향한 경주’는 너무 당연하다. 학교나 교사에게 낙오자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아이들은 오직 ‘문제 잘 푸는 법’ ‘시험 잘 보는 법’을 배우러 학원으로 내몰린다.

이런 우리와 반대편에 서 있는 나라가 핀란드다. 핀란드는 ‘선택과 경쟁’ 대신 ‘평등과 협력’에 집중한다. 학교마다 ‘특수교육 전담교사’를 둬 별도 지도가 필요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낙오자를 없앤다. 학생과 교사를 ‘성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1990년대 과학 교육과정을 만드는 특별위원회에 참여한 노키아의 최고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수학이나 물리학을 모르는 젊은이를 채용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습니다. (중략)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 실수하는 게 무서워 다르게 생각하거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을 줄 모르는 사람을 채용한다면…. (중략) 지금 핀란드 학교에 있는 창의력과 열린 마음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파시 살베르그 ‘핀란드의 끝없는 도전’)

핀란드와 비교하면 우리 교실은 ‘바나나 농장’ 같다. 곰팡이균이 유발하는 ‘파나마병’ 때문에 초토화되고 있는 바나나 농장 말이다. 세계 바나나 시장의 96%를 차지하는 ‘캐번디시’ 품종은 현재 멸종위기다. 파나마병은 이미 1903년 ‘그로스미셀’ 품종을 멸종시킨 적이 있다. 바나나의 멸종은 효율과 생산성만을 따진 결과다. 다양하지 못한 생물집단은 외부 충격에 약하다.

우리의 학교도, 학생도 그렇다. 아이들을 ‘단일 품종’으로 키웠고, 키우고 있다. 단일 품종은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능력이 뛰어날지 몰라도 ‘정상’으로 가는 다양한 길을 탐험할 줄 모른다. 창의력이나 열린 마음 따위는 없다. 그러니 100억원대 뇌물을 챙기고도 거짓말을 일삼는 검사장이나 99%의 국민을 개·돼지라고 부르는 교육부 공무원이 생기는 거다.

만든 의도나 시기 등을 가리고 보면 국민교육헌장은 꽤 의미심장한 문구로 채워져 있다.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교육부 공무원들부터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외웠으면 한다.

김찬희 사회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