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된 '전설'… 선수로, 믿음의 전사로돌아왔다

입력 2016-07-22 21:06
지난 12일 오후 인천시 부평 신트리공원에서 열린 헤브론보아스여성축구선교단 창단 기념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축구선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헤브론보아스여성축구선교단원들이 12일 저녁 부평산곡교회에서 열린 창단 감사예배에서 특송을 부르고 있다.
임재훈 이사장(오른쪽)이 이미화 선수에게 선교사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가운데 강대상에 있는 이가 류영수 목사.
"여자가 축구를 한다고? 시아버지 밥상을 발로 차버리려고 그런 걸 하나!"

1948년 전국여자체육대회 국내 첫 여자축구 경기가 열리자 사람들은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반대했다. '시아버지 밥상을 찬다'는 그 무렵 한 잡지의 표현이 재밌다.

첫 대회에선 서울 무학여중이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경기는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가슴으로 오는 공은 두 손으로 막아도 핸들링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이다.

여성축구 역사 68년. 그렇다면 기독교 여성 축구단이 있을까 없을까. 답은 '있다'이다. 취미로 하는 팀이 아닌 실업팀 성격을 지닌 헤브론보아스여성축구선교단(단장 임재훈 부평산곡교회 목사)이 존재한다.

이 팀은 선수 출신 류영수(64·헤브론축구선교회 담임 겸 대표) 목사가 19년 전 출범시켰다. 선수와 재정 부족 등으로 명맥이 끊기기도 했으나 지금은 세계를 무대로 뛴다.

류 목사는 축구계 안팎에서 ‘걸레’로 통한다. 축구선교로 세상을 닦아 정화시키겠다는 사명과 집념이 남다르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26년 전 인천시 외곽 박촌의 허름한 지하 건물에 ‘헤브론축구선교회’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서른아홉 나이였다.

그리고 오늘. 헤브론축구선교회는 전국 76개 지부를 비롯해 아시아에 15개 지부를 둔 조직으로 발전했다. 60세 이상의 실버축구단 240개, 70대 이상이 주축인 장수축구단 80개, 여성축구단 200개 등이 그가 일군 성적표다.



축구선교로 세상을 닦는 ‘걸레 목사’

그는 초지일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축구선교관을 강조하고 다닌다.

65년 서울 은평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화를 신은 류 목사는 충북 제천농고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제천 현대시멘트에서 축구선수로 뛰었다. 겉만 보면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삶의 전환점을 맞기까지 험난한 길을 걸었다.

“남들이 평생 마실 술을 스물아홉 무렵에 몽땅 마셔버렸습니다. 현대시멘트 축구선수로 입사한 후에는 과도한 음주 때문에 문제 사원으로 취급받았지요.”

이후 축구코치로 활약도 하고, 운동구점과 술집도 경영했지만 죄다 1년을 채우지 못했다. 82년 서울역 부근을 배회하다 극단적인 생각을 품기도 했다.

“‘이제 뛰어들자’ 하는데 하나님이 크게 꾸짖는 것이었어요. ‘그만큼 못된 짓 했으면 이젠 돌아와야지. 내가 널 쓰려고 축구선수로 키웠더니, 네 맘대로 죽으려고 해’ 하시는 겁니다.”

새 삶을 찾은 류 목사는 술과 담배를 끊고 목회자 축구단, 평신도 축구단, 교회선교 축구단 등을 지도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그리고 90년 헤브론교회와 헤브론축구선교회를 세웠다. 당시 ㈜낫소여자축구단의 축구교실 학생들과 친선경기를 가진 것이 선교 축구의 시발점이 됐다.

97년 낫소여자축구단이 외환위기(IMF)를 견디지 못하고 해체됐다. 축구만 바라보고 살던 20대 초반 낭자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류 목사는 그 팀 8명의 선수를 데려와 헤브론여자실업축구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의 장벽은 녹록지 않았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실업축구단은 선수 수급이 잘 안 돼 6년 정도 버티다가 휴식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40대 아줌마로 컴백한 여자축구 레전드들

그 20대 초반 팔팔했던 낭자들이 이제 40대 초·중반이 됐다. 하지만 축구사랑만큼은 예전이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류 목사를 중심으로 다시 깃발을 들었다. 재창단해 복음을 전하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지난 12일 인천 부평구 산곡교회에서 헤브론보아스여성축구선교단 창단 감사예배와 선교사 임명식이 열렸다. 64년 일본 도쿄올림픽에서 수문장을 맡았던 오인복(80) 전 축구 국가대표, ‘전설’의 이차만(67), 김진국(66) 전 국가대표 등 100여명이 참가해 류 목사와 되돌아온 아줌마 선수들에게 갈채를 보냈다.

유미영(45) 헤브론축구선교회 권사는 지금은 없어진 체육선교신학교 출신이다. 그도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류 목사의 권유로 98년 축구선수가 됐다. 유 권사는 ‘차범근축구교실’ 지도자가 돼 올 2월까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 모세와 7세 아들 여호수아에게 못다 한 엄마의 꿈을 대물림하고 있다.

국가대표 출신 김명숙(47·부천 오정구 파랑새팀) 감독도 핵심 멤버다.

이날 감사예배의 하이라이트는 선교사 임명식이었다. 축구 선교에 청춘을 바친 ‘올드미스’ 이미화(43) 선수가 그 주인공. 팀 해체 후 류 목사 곁에서 헤브론축구선교회 간사 역할을 했다. 축구와 결혼한 딸의 황소고집을 꺾지 못한 부모가 이날 경북 상주에서 올라와 꽃다발을 안겼다. 불교신자인 부모는 선교사가 된 딸과 함께 복음성가 ‘실로암’을 따라 불렀다.

류은영(43) 집사는 이단에 빠졌다가 류 목사의 도움으로 건강한 신앙생활을 되찾았다. 남편과 시내버스를 운전하면서 축구선교에 힘쓰고 있다.

국가대표 출신 노강숙(42) 사모는 선수들의 정신적인 지주다. 2001년 제82회 전국체전에서 무릎 부상으로 은퇴하고 찬양 사역자인 남편 전용대 목사를 만나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전북 고창 강호상고 출신 류문희(41) 집사는 국제시합 때 골든골을 잘 터뜨려 ‘해결사’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경기도 부천과 안산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올가을 인천대 체육학과에 입학할 예정인 팀의 막내 김란(32) 선수는 중국 옌볜에서 온 조선족이다. 2002년 해란강여자축구단 출신으로 류 목사가 신앙으로 양육했다.

팀의 최고령 선수 백인자(51)씨는 아직 교회 문턱을 넘고 있지 않지만 류 목사의 축구 리더십에 이끌려 헤브론보아스여성축구선교단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창단감사예배를 무사히 마친 류 목사는 “아직도 여자가 축구하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이들이 없지 않다”며 “세계적인 스타가 된 ‘지메스’ 지소연(첼시 레이디스) 선수는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천=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