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대한 가장 직설적인 해석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다면 가족이어도 과감히 갈라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족 간의 분열까지도 감수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좀 더 풍성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른 복음을 알고, 그것을 지켜내고, 더 나아가 전파하는 길을 가기로 결단했자면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을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세상으로부터 마냥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과학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초과학적이며 초이성적입니다.
그래서 사고(思考)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현대인에게 복음은 어리석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무시하거나 혹은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박해로 인해 믿음의 백성이 절대로 좌절하거나 그 길에서 돌아서지 말라는 당부요 격려입니다.
더불어 그 박해는 가족으로부터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하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십니다. 예수님은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그분이 전하신 복음의 권위가 부모의 권위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부모의 권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신적인 권위에 해당합니다. 즉 예수님은 부모보다 더 귀한 존경의 자리에 계신 하나님이시요, 최고의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박해가 있더라도 끝까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지켜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검으로 상징된 분열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7∼38절은 예수님보다 부모나 자녀를 더 사랑하는 자를 향해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도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합당하다’고 표현되는 단어는 헬라어 ‘악시오’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거나 종교적 신분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라는 사실을 알고, 의심의 여지없는 옳은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내는 사람을 향해 ‘합당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합당한 자’는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이제 예수님과의 관계에 최우선의 관심을 두시기를 권면합니다. 각자가 ‘합당한 자’로 살아가기로 결단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으실 것이요, 그 한 영혼을 통해 그의 가족과 그의 이웃이 바르게 세워져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호재 목사 (서울 제자인교회)
◇약력=△개신대학원대학교 졸업, 미국 리폼드신학교 졸업
[오늘의 설교] 합당하지 아니하며
입력 2016-07-22 2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