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유장춘] 최선과 최악 사이에서

입력 2016-07-21 18:26

인터넷을 따라 여행하다 보면 아주 난잡하고 요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고요한 상념에 잠기게 되는 때가 있다. 오래전 보도된 기사지만 전직교사 김남식 할아버지 같은 분을 발견할 때가 그렇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말 쓰기를 가르쳤다. 정년퇴직 후, 30여년간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으로 동대문구 회기동 주변의 쓰레기를 주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교사로 일할 때도 집게와 양동이를 들고 학교 주변과 동네 청소를 했다고 한다. “내가 버린 쓰레기를 내가 줍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면서 쓰레기 줍는 일을 해왔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편으로 일제의 잔재인 ‘국민학교’ 명칭 바꾸기 운동에도 공헌했다.

김 할아버지는 퇴임하는 명예로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민족 반역자입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한글을 말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라고 독려하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러고도 이제까지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반민족 처벌이 있었다면 저는 분명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저는 이런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교사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과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또다시 각각 두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정의를 행하고 나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 정의를 행하고 나서 정죄하고 심판하고 교만하게 사는 사람, 불의를 행하고 나서 뉘우치고 변화해서 겸손하게 사는 사람, 불의를 행하고 나서도 오만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게 사는 사람이다.

최선의 사람은 정의를 행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인데 매우 보기 드물다. 차선의 사람은 불의를 행하였지만 뉘우친 사람인데 조용히 살아가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차악의 사람은 정의를 행하였지만 교만한 사람인데 너무 설쳐서 역겹다. 최악의 사람은 불의를 행하면서도 오만한 사람인데 언제나 주류가 되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다.

국민을 개·돼지에 비유하면서 신분제를 지지하는 교육전문가가 나타나 세상을 탄식하게 만들더니 자신들이 저지른 명백한 잘못이 온 지상에 드러난 후에도 ‘음습한 정치공작’이라고 역공하는 세태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선거패배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그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또다시 세력을 모으고 공작을 한다. 이런 일이 너무 반복되어 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에 따르자면 차악의 사람이 최선의 사람을 몰아내고, 최악의 사람이 차선의 사람을 쫓아낸다. 세상은 차악의 사람들과 최악의 사람들이 싸우느라고 늘 어지럽고 시끄럽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최악보다는 차악의 사람들이 이겼으면 좋겠다.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 놈들이 다 해먹는다.”

세상을 그렇게 무 자르듯이 조각조각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잘못하고 어느 정도 잘하는 것이 천 가지 만 가지 섞여 있으리라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리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바르게 설정하기 위해서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최선의 사람은 못 되더라도 차선의 사람은 되려고 노력해야지 결심해본다.

유장춘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한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