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주류 친박(친박근혜)계가 폐족(廢族) 위기에 몰렸다. 소문으로 떠돌던 친박 핵심 인사의 공천 개입 정황이 녹취록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도덕적 상처뿐 아니라 구심점도 잃었다. 협박에 가까운 통화 내용은 ‘개입이 아닌 중재’라는 해명을 무색케 한다. 대통령을 팔아 호가호위했다는 비난부터 실정법 위반 소지가 짙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여권에선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권력누수)을 막기 위해 친박계가 당권 장악에 집착한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권 집착이 부른 ‘부메랑’
새누리당 한 중진 의원은 20일 “생로병사(生老病死)처럼 인위적으로 못 막는 게 레임덕”이라며 “레임덕을 막아야 한다는 초조함이 레임덕을 오히려 앞당겼다”고 말했다.
여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친박계의 4·13총선 공천 개입은 어느 정도 예견됐었다. 박근혜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당은 박 대통령과 친박계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14년 서울시장 경선에선 친박계가 지원한 김황식 전 총리가 비박(비박근혜)계 정몽준 전 의원에게 패했다. 19대 후반기 국회의장 경선과 이어진 원내대표 경선뿐 아니라 ‘맏형’인 서청원 의원을 내세운 전당대회에서도 비박계에 무릎을 꿇었다. 당내에선 “일부 돌격대를 제외하면 친박계는 ‘한줌’에 불과하다”는 조소까지 나왔다. ‘유승민 사태’로 불리는 국회법 개정안 통과 사태를 겪으면서 친박계 핵심에선 박 대통령의 임기 후반기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다수파 지위 회복과 당권 장악이 절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친박계의 입김이 작용한 새누리당 공천은 ‘파동’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총선 참패로 이어졌다. 시대정신연구소 엄경영 대표는 “녹취록 사태로 건전한 비판과 견제가 가능한 수평적 당청 관계를 원했던 민심에 여권 주류가 역주행한 게 판명났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선 대구·경북(TK)과 충청 연합을 통해 정권을 재창출해 박 대통령 임기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친박계의 구상 역시 흐트러지게 됐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권 한 인사는 “친박계가 몰락의 길을 걸을 경우 ‘친박 후보’ 이미지가 생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권 행보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사드 배치’에 대한 TK 친박계 의원들의 집단 반발로 박 대통령의 친박계에 대한 신뢰는 이미 손상됐다는 주장도 있다.
한 발 빼는 지도부, 친박 반발
친박계는 ‘배후설’을 제기하며 비박계의 녹취록 공세에 맞대응했다. 서청원 의원은 이날 자신의 지역구 공천 개입 정황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된 것과 관련해 “음습한 공작정치 냄새가 나는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그는 “미안하게 생각한다”면서도 “당내 공작정치 냄새가 나는 일이 생기면 더 이상 가만히 안 있겠다”고 했다. 또 청와대의 공천 개입설을 묻는 질문에 “청와대가 개입할 일이냐”고 반문한 뒤 “(김성회 전 의원이) 유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도부는 당 전체의 책임으로 몰고 가며 한 발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 김희옥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비대위회의에서 “원칙에 따라 대처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총선 참패 책임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지금은 뒤늦은 책임공방을 벌일 때가 아니다”며 “모두가 사죄하고 자숙할 때”라고 했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
[이슈분석] “레임덕 막으려 당권 집착… 되레 부메랑”
입력 2016-07-21 0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