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주님이 원하시는 헌신

입력 2016-07-20 21:15

교회에 헌신하는 어느 성도에게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로 인한 고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이 예수님께서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에게 칭찬은커녕 꾸중하는 내용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자신도 예배 도중에 나와서 애찬을 준비하기보다 차라리 끝까지 참여해야 맞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는 겁니다. 그게 과연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의 뜻일까요. 본문을 살펴봅시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일행을 대접하는 일 때문에 분주했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그런 동생이 얌체 같아서 밉게 보였을 것이고 동시에 마리아의 행동이 당시 사회통념을 거스르기 때문에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당시 선생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은 남성 제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동생을 꾸짖지 않고 뭐하느냐고 타박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41∼42절) 예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십시오. 마르다의 헌신이 헛되고 필요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르다가 분주해하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동생을 야단칠 정도로 과도한 대접은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접이 시원찮으면 모욕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영혼구원으로 양식을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온전히 살게 할 수 있다면 피곤함이나 배고픔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약자를 사랑하고 배려하십니다. 누가복음은 이를 특히 잘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주의 발치에 앉아’(39절)라는 부분의 원문은 수동태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말씀을 듣고 제자로서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온전히 사람대접을 받게 하는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만일 마르다가 이런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서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는 편을 택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비록 손대접이 시원찮다고 해도 주님은 기뻐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절)

이것을 알지 못한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깨우침을 준 것입니다. 그의 헌신·봉사를 몰라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헌신을 요구한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헌신은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헌신,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 안에서 온전한 제자로 살게 하는 헌신입니다. 이를 방해하는 봉사는 아무리 크고 대단할지라도 주님께는 쓸모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비판하면서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주님이 받으시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것은 다 자기과시요,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이를 잘 기억함으로써 시험에 들지 않고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봉사의 삶을 사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준곤 목사 (선한루터목자교회)

약력=△루터대학원 졸업 △현 기독교한국루터회 교육분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