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막바지였던 1987년 봄 서울의 한 대학 캠퍼스. 총학생회가 가두시위를 하기 위해 학생들을 모았다. 간부들의 잇단 사자후에 열기는 달아올랐지만 교문 앞에 떡 버티고 있는 백골단(사복경찰)의 서슬에 선뜻 발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이때 학생회장이 나서 자신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혈서를 써 내려갔다. 피를 본 학생들은 강철대오의 스크럼을 짠 뒤 백골단에 맞섰다. 그날 혈서는 그렇게 민주화에 기여했다.
혈서(血書)는 예부터 자신의 각오를 피로 맹세함으로써 본인은 물론 주변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일제치하의 독립투사들은 동지들과 혈서를 나눠 쓰곤 했다. 1909년 3월 안중근 의사와 동의단지회 동지 11명은 각각 왼손 넷째손가락(무명지)을 끊고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쓴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토 히로부미 척결을 다짐한 안 의사는 그해 10월 그 약속을 지켰다.
이랬던 혈서가 근래 들어 좀 묘하게 이용되고 있다.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 지역으로 선정된 경북 성주군수와 지역 인사 10여명이 배치에 반대하는 혈서를 썼다. 지역주민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드 배치가 군수와 지역 유지들이 혈서까지 쓰며 반대할 일인가 싶다.
황당한 혈서도 있다. 경남 의령군 의회 의원들이 의장 자리를 놓고 담합을 했는데 조직폭력배처럼 각서에 ‘혈서 지장’을 찍은 것이다. 2014년 7월 작성한 문서엔 전·후반기 의장단 이름과 위반할 경우 1억원씩을 내놓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후반기 의장을 ‘예약’한 의원이 수지침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나온 피를 인주에 섞자 모두가 혈서 지장을 찍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켜지지 않아 2년 만에 세상에 드러났다. 본인 피로 쓰는 걸 억지로 말릴 수야 없지만, 혈서가 과거 우리 사회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되돌아본다면 그리 남용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한민수 논설위원
[한마당-한민수] 혈서(血書)
입력 2016-07-18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