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나는 우선 체육조직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1990년대 초 서울 노원구 태권도연합회를 조직하고 선거를 통해 회장에 선출돼 7년 동안 태권도와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때 태권도연합회장배 태권도대회를 육군사관학교 실내체육관에서 개최했다. 이후 노원구 체육회 이사로 10여년 봉사했다. 95년에는 지역의 축구 배구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볼링 연합회 회장 등 36개 단체와 협력해 노원구생활체육협회를 결성했다. 이 밖에도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운동본부장, 학원폭력감시단장, 검찰청범죄예방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정치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학생·노동·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 최후의 재야운동가로 추앙받던 장기표 선생님의 문하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97년경 무작정 서울 용산역 근처에 있는 장 선생님의 신문명정책연구소를 방문했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장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장 선생님의 국가관 가치관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렇게 장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연구원으로 새로운 정당을 건립하기 위해 힘썼다. 장 선생님과는 푸른정치연합을 창당해 대변인으로 활동했으며, 2000년 민주국민당 노원을 후보로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2002년 장 선생님은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고 나도 뒤따라 입당했다. 당시 나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청년실업특위 부위원장으로서 노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2004년에는 17대 국회의원 후보에 공모했지만 다른 후보에 밀리고 말았다. 힘이 빠졌다. ‘아니, 어떻게 노원구에 살지도 않는 후보를 총선 후보로 내세운다는 말인가.’
중앙당에 여론조사와 재심을 요청했다. 초조하면서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결국 총선 후보가 됐다. 모두들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사람들도 지구당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총선을 며칠 앞두고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합세해 노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했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피땀 흘려 선거 현장을 뛰고 1만표를 얻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비통했다. 나는 곧바로 순복음노원교회로 달려가 손수건을 흠뻑 적실 정도로 주님께 기도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죄 없는 아내와 3남매에게 미안했다. 무조건 좌절하고 낙담할 순 없었다. 선거 다음날부터 교회를 찾거나 수락산 불암산 등산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유재필 담임목사님의 위로가 컸다. ‘그래, 도전하는 자만이 도약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님이 늘 외치시는 절대 긍정, 절대 희망의 자세로 다시 시작하자.’
2차례의 낙선은 나에게 큰 교훈을 줬다. 더욱 겸손하고 덕으로 사람을 대하며 사랑으로 인간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벽제단과 철야예배, 주일예배를 이어가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에서 기도했다.
2008년이 다가왔다. 18대 총선 때는 당연히 공천이 되리라 믿었다. 고난의 시기를 겪은 민주당에서 지역위원장을 맡아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치렀기 때문이다. ‘당 발전을 위한 공헌도가 있으니 당연히 공천을 받겠지. 삼세판에 분명 당선의 수가 있을 거야.’ 하지만 공천은 다른 사람이 받았다. 충격이었다. 그러나 나는 깨끗이 승복하고 중앙당에서 전국청년선거대책위원장으로 전국을 순회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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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7-18 1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