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가로수길에 가게를 낼 정도면 이미 서민은 아니지 않나요?” 서울 가로수길 ‘리쌍 건물’을 둘러싼 임대차 갈등은 리쌍 편과 임차인 편으로 여론을 양분했다. 계약 갱신 요구를 제때 하지 않아 강제퇴거 위기에 처한 임차인 서윤수씨를 두고 일부는 ‘을질한다’고 비판했다.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가수를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한다”는 것이었다. ‘갑을 논란’ 때마다 갑의 횡포에 분노하고 을을 전폭 지지하던 여론이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리쌍 사태는 상징적 사례다.
2013년 1월 남양유업의 대리점 ‘밀어내기’와 욕설 파문은 우리 사회에 갑을 논란을 촉발시켰고, 2014년 재벌 3세의 땅콩 회항 논란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야당에서는 ‘을지로(을을 지키는 길) 위원회’라는 조직까지 등장했다. 소설가 박민규는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에 “우리를 뜨겁게 달군 갑질 논란은 그 자체로 하나의 벽돌이 되었다. 희망은 이 작은 벽돌에 있다”며 “이것만이 진격해오는 거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을질”이라고 했다. 하지만 1년 반이 지난 지금, 벽돌은 종종 갑이 아닌 을에게 향하고 있다.
을에게 던져지는 벽돌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기에 문자로 해고 통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두고 ‘부당해고’라고 노동위원회에 진정을 했더라고요. 이거야말로 을질 아닙니까.” 프랜차이즈 점주 A씨는 3일 만에 아르바이트생을 해고한 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17일 호소했다. 4인 이하 사업장은 부당해고 등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데도 아르바이트생들이 무작정 진정부터 넣고 본다는 내용이다. A씨는 아르바이트생의 권리인 구제 신청이 을질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사회 전형적인 ‘을’인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시선도 차갑다. 한국인과 말다툼을 하다 수차례 뺨을 맞은 외국인 노동자를 다룬 기사에는 “외국인은 믿을 수가 없다. ‘외노자’를 추방해야 한다” “그러니 평소에 범죄를 짓지 말아야지” 등 비난 댓글이 달렸다.
‘합리적 공감’의 필요성
을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는 이유는 왜일까.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각박한 현실이 약자에 대한 공감 대신 비난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 교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힘들다’고 여기는 이들에 대한 연대나 공감을 철회하고 ‘강자’에 공감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은 건물주도, 임차인도 되지 못하는 처지”라며 “이런 상황에서 임차인의 편을 든다고 해서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기 때문에 상상의 차원에서나마 강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의 꿈이 ‘강남 건물주’라고 하는데, 현실에서는 이를 이룰 수 없으니 상상으로나마 건물주와 연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을의 진실’이 의심받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갑을 논란에 편승한 을의 사건들이 일부 알려지면서다. 지난달 한 주류회사 회장의 운전기사가 언론사에 회장의 갑질을 폭로하겠다며 억대 합의금을 요구했다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운전기사가 사회적 이슈에 편승해 회사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허위사실을 언론에 유포하려는 태도를 보이며 금품을 갈취하려 해 죄질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을은 언제나 약자’라는 공식에 금이 간 사건 중 하나였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있는데도 갑이 잘못됐다는 주장만 내세우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며 “약자라 하더라도 공평하게 법질서를 따라야 하는 건 당연하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갑을 관계가 고착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을에게 과도한 비판의 칼날을 세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임영희 맘상모(맘 편히 장사하고픈 상인 모임) 사무국장은 “임차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싸우게 된 건 3년여밖에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관계를 오해해 을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며 “건물주와 임차인의 문제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기획] 돌연 ‘乙’에 차가워진 시선… 왜?
입력 2016-07-18 04:20 수정 2016-07-18 1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