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그 많던 전봇대 다 어디 갔을까

입력 2016-07-17 18:58

검은 전봇대가 있었다. 시멘트 거푸집에 넣어 만든 길고 곧은 시멘트 전봇대는 큰길에 있었고, 논 가운데 전깃줄은 나무 전봇대에 걸쳐 있었다. 죽은 나무가 오랫동안 비와 바람을 맞으면 단단해져서, 한전에서는 가지만 다듬어 전봇대 대신 사용했던 것이다. 동생과 나는 논 가운데 난 길에 있던 전봇대를 ‘검은 전봇대’라고 불렀다. 그 검은 전봇대는 우리집에서 사촌들이 사는 큰집으로 가는 길 3분의 1 지점에 있었다. 어느 날 나와 동생이 우리 집에서 큰집까지 걸음수를 헤아리며 걷던 적이 있었다. 내 걸음으론 80걸음이었지만 동생 걸음으론 100걸음도 넘었다. 나는 내가 잰 게 맞다 했고, 동생은 자기가 맞다 우겼다. 그때는 내가 동생보다 훨씬 컸는데. 우리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큰집에 놀러갔고, 큰집에 가면 우리는 언제 싸웠냐는 듯 까맣게 잊고 언니들과 고무줄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토끼풀과 민들레와 제비꽃을 따다가 다 쓴 큰엄마 화장품 뚜껑에 담아 소꿉놀이를 했다.

나에게 전봇대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지만 전봇대는 전기를 전달하는 송전탑의 작은 버전일 뿐이다. 어느 순간 동생과 내가 발걸음으로 거리를 재던 논 가운데 작은 길은 사라지고 그 위에 백화점과 아파트와 공원이 있는, 차가 막히는 큰 길로 변해버렸다. 신도시에 전봇대는 모두 지하에 매설돼 이제 내가 사는 도시 어디에도 전봇대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 도시에 필요한 전기는 나무 전봇대로 전달하는 전기로는 어림도 없다고.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사는, 도시에서 먼 마을에 암이 걸릴 정도로 큰 전류가 흐르는 탑을 설치해야만 한단다. 모두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모두 가진 것을 조금씩 내놓으면 될 텐데. 그리고 많이 가진 이는 조금 더 많이 내놓으면 좋은데. 꼭 없는 이들에게만 가진 것을 다 내놓으라는 식이다. 전기로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집으로 올라가는 신도시 아파트에 사는 것이 몹시 부끄럽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들이 보이지 않는 가까운 곳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는데. 그것들은 모두 지하에 있어서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유형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