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선 미술품 거래 때 이력 신고 안하면 제재”

입력 2016-07-17 18:39 수정 2016-07-17 21:45
‘위작 논란’에 휩싸인 이우환 작가.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시스
위조범은 잡혔는데, 작가는 “모두가 내가 그린 진품”이라고 맞서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가 이우환(80)의 작품 위작 유통 사건을 두고 진실 게임이 진행 중이다.

장 미셸 르나드 프랑스전문감정가협회(CNES) 부회장은 지난 8일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프랑스에서라면 절대 일어나지 못할 일”이라고 말했다. “작품이 팔릴 때마다 판매 정보가 경찰에 보고 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어 유통 경로를 추적하면 위작 여부가 쉽게 가려진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열린 ‘미술품 유통 투명화 및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 참석차 방한했다. 발제 내용과 인터뷰를 토대로 한국의 후진적 미술 유통 및 감정시스템을 짚어본다.



위조범에 흘러간 ‘수표’의 진실은

작가와 경찰이 맞선 진실게임에서 작가가 수세에 몰린 형국이다. “호흡이나 리듬, 채색을 쓰는 방법이 모두 내 것”이라는 작가의 진작(眞作) 주장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진실게임이 여론 재판의 성격으로까지 치닫는 상황에서 작가는 대중이 납득할 반박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경찰은 진작과 위작의 물감 성분 차이, 캔버스 틀의 인위적 노후화 등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를 제시했다. 위조범은 캔버스 천의 나무틀 고정방식과 레이저빔을 사용한 위조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재현했다.

경찰이 위작이라고 판정한 13점의 작품은 1978, 79년에 제작됐다. 서명수 변호사는 “당시 제작된 도록 등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면서도 “하지만 당시 그린 작품이 600∼800점이 되는데, 6점을 기준작 삼아 안료를 비교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반박했다. A화랑 대표는 “항공 운임을 줄이기 위해 틀을 뜯고 캔버스 천만 가져와 틀을 다시 제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면서 캔버스 틀의 증거력 부족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안목감정, 과학감정을 떠나 유통경로를 통해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매자들이 지급한 수표 약 23억원이 유통책과 위조 주도자에게 입금된 금융 거래 내역을 경찰이 확보한 것은 작가에게 날린 결정적인 한방이라는 시각도 있다. 서 변호사는 “다른 거래에 대한 대가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반박이 가능한 것은 국내 화랑들의 작품 유통 문화가 불투명한데서 기인한다.



프랑스에서는 작품 판매 때마다 ‘폴리스북’

프랑스에서는 미술품의 매매가 이뤄질 때 마다 화랑이 경찰에 거래이력을 신고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폴리스북’(livre de police)에는 작가명, 작품명, 작품크기, 제작연도, 제작방법 뿐 아니라 거래방법도 적혀 있다. 현금인지, 계좌이체인지, 신용카드를 썼는지까지 상세히 적는다.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받는다.

르나드 부회장은 “17, 18세기 등 고미술 작품의 경우 안료가 시대별로 달라 과학적 감정을 통해 진위를 가리기 쉽다. 그러나 동시대미술 작품은 시기가 짧아 감정을 통해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작품 거래의 히스토리를 찾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당국에 판매 내역을 제출하는 의무가 없다. 화랑은 작품이 판매될 때 구매자에게 작품 보증서를 준다. 화랑협회가 권고하는 양식에는 작가명, 작품명, 작품크기, 제작기법, 참고사항과 함께 발행일을 명기하도록 돼 있다. 가격과 결제방법을 적는 난은 없다. B화랑 대표는 “내부 장부에 가격을 적는데, 소매가와 팔린 금액이 다를 경우 둘 다 적어두기도 한다”고 말했다. 내부용에도 대금 지불 방법 등이 없다보니 화랑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통해 금융 흐름을 정확히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구조다.



프랑스에서는 잘못 감정하면 감정가도 징계

세미나 초반 미술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우리나라 감정시스템도 선진국에 뒤지지 않다”는 자찬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진입 장벽이 똑같이 낮다는 것에서 오는 착각이었을 뿐이다. 감정가에게 전문성을 요구하고 엄격하게 책임을 묻는 ‘책임 감정 문화’를 듣지 않고 나온 소리였다.

르나드 부회장은 “프랑스에서도 미술 감정가에게 자격을 주는 국가주관 시험은 없다. 미술 시장에서 7∼10년의 경험이 있으면 감정가로 활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익명성에 숨어 감정하는 우리나라 감정 문화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감정 실명제가 관행화돼 있다. 그는 감정을 정확하게 하지 못해 감정가가 법적 처벌을 받은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CNES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민간 감정기관으로 3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보여준 회원 명단 수첩에는 감정가별로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등 전문 분야가 정확히 기입돼 있었다. 카미유 피사로(프랑스 인상파 창시자) 등 특정 작가만 전문으로 하는 감정가도 있다. 또 회원 감정가의 주소와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까지 공개한다.

2007년 출범한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은 한국에서 가장 공신력을 가진 민간감정기관이지만 30명의 감정위원이 동·서양화로만 나눠 활동하고 있다. 감정평가원 관계자는 감정위원 명단을 알려달라는 요구에 “한 번도 명단을 외부에 제공한 적이 없다”며 거부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