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극 대회가 열렸다. 신과 짐승과 인간이 출전했다. 짐승들이 나와서 연기한다. 원숭이는 갖은 재롱을 다 부리고 새들은 날면서 멋진 기교를 부렸다. 사자나 코끼리는 엄청난 힘으로 순식간에 공포 분위기도 만들었다. 다음은 신들이 나와서 연기했다. 신들은 역시 신답게 다른 출연자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다. 마지막이 인간 차례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이 최고였다. 인간은 짐승처럼 사납고 비열하게 행동하다가 순식간에 신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짐승들은 제아무리 연기를 해도 짐승이었고 신은 별 신비로운 상황을 다 연출해도 언제나 신인데 인간은 달랐다. 짐승처럼 낮아지고 신처럼 높아지면서 온갖 변신이 가능했다.
사람 속에 난폭함과 공손함, 비열함과 정의로움, 증오와 사랑 등 이율배반적인 본성이 있다는 통찰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16세기 피렌체공화국과 유럽의 상황에서 쓰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싸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법에 의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첫째 방법은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고, 둘째 방법은 짐승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로는 많은 경우에 불충분하기 때문에 후자에 의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군주는 모름지기 짐승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을 모두 이용할 줄을 잘 알아야 합니다.”(군주론, 까치·123쪽)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인간 사회에 많다는 마키아벨리의 견해는 현실에 대한 통찰로는 틀리지 않다.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악한 욕망이 사람을 짐승처럼 변하게 한다. 대놓고 악하지는 않지만 먹고살자니 어떤 때는 피치 못하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내 이익을 챙길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마땅하다고 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어떤 현실을 마땅하다고 판단하면 그 상황을 정당하다고 보는 가치관을 갖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개돼지처럼 먹을 것만 배부르게 주면 된다고 보는 사람은 ‘개돼지 인간론’을 갖는다. 인생관과 가치관의 토대가 인간에 대한 이해인데, 개돼지 인간론을 가졌으니 인생의 가치관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근자에 교육부 고위 공직자의 개돼지 인간론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우리 사회에서 99%의 사람은 그저 개돼지로 취급해서 다스려야 하고 상위 1% 엘리트의 신분이 공고하게 돼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를 파면시키기로 했지만 근본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고 보인다. 우리 사회가 가진 사람에 대한 이해가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말이다. 이 사안에 대해 기독교적 가치관을 분명하게 공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이른바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해 찬반이 있고 찬반의 각각에서도 많은 의견이 있지만, 가치관의 영역에서 기독교가 적극적이고 분명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성경은 사람이 존귀하다고 가르친다. 사람의 창조를 기록한 창세기 1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인 27절을 보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사람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에 역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중심이 인격성과 자유의지다. 인격적인 존재는 자유의지를 갖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한 자유의지를 주면서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는 개돼지 인간론을 근본적으로 극복해야 사람이 살 만한 사회가 된다. 타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이 사람됨이다.
지형은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지형은] 개·돼지 인간론
입력 2016-07-14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