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90개국에 인터넷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넷플릭스가 최근 한국에서 미디어 앞에 섰다. 리드 헤이스팅스 공동설립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참석했다. IPTV나 케이블TV 등 유료방송 사업자들이 긴장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한국 시장에서 어떻게 가입자를 늘려가겠다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대신 한국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봉준호 감독을 전면에 내세웠다. 넷플릭스는 봉 감독의 신작 ‘옥자’에 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능력 있는 한국 콘텐츠 제작자에게 ‘제2의 봉준호’가 될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넷플릭스는 인구 5000만명인 한국을 시장으로서의 가치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공급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여기는 것이다.
최근 만난 한 IT 업체 관계자는 “인공지능(AI)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해외 기업들이 한국과의 협업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AI에는 정교한 알고리즘 못지않게 방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데이터가 많다고 무조건 되는 게 아니다. 많은 양의 데이터가 디지털화되고 체계적으로 분류돼야 한다. 한국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온갖 종류의 데이터가 디지털화돼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AI를 연구하려는 업체에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 기업에 한국은 여전히 혁신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나라로 여겨진다. 가장 빠른 IT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고, 시장 규모는 크지 않지만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소비자도 있다. 한국 시장 자체를 겨냥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근거로 전 세계 시장에 통할 서비스를 만든다는 성격이 강하다.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 혁신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남을 돕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넷플릭스의 등장은 전 세계 방송과 통신 시장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방송과 통신은 융합하는 추세이고, 미국에서는 유선방송 구독을 중단하는 ‘케이블 커팅’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을 통한 동영상 시청이 늘면서 케이블TV 가입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중이다.
넷플릭스는 강력한 플랫폼 못지않게 뛰어난 자체 콘텐츠가 있어야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독점 콘텐츠가 오늘날 넷플릭스를 있게 한 일등공신임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현재로선 우리나라에서 넷플릭스 같은 서비스가 나올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IPTV와 케이블TV 간 자율적인 구조조정의 시발점이 될 것으로 보였던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인수·합병(M&A) 시도가 정부에 의해 막혔다. 출구전략이 막힌 케이블TV 업계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투자를 늘리려던 SK텔레콤 모두 미래를 준비하는 동력을 잃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건 모든 IPTV, 케이블TV 사업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시기가 문제일 뿐 모두 언젠가는 그 길을 가야 한다는 데 입을 모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인수·합병 심사 보고서를 내놓기까지 7개월이 걸렸다. 그만큼 검토할 것이 많았고, 고민도 충분히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5∼10년 후 방송시장 변화와 해외 업체와의 경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봉 감독의 ‘옥자’는 내년 넷플릭스를 통해 독점 방영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내 방송시장에 또 한 번 큰 변화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방송시장이 더 이상 국내 업체 간의 ‘땅 따먹기’가 아닌 글로벌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 그때 지금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려된다.
김준엽 산업부 차장 snoopy@kmib.co.kr
[세상만사-김준엽] 혁신노력 걸림돌 없어야
입력 2016-07-14 19:10